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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산책>

곰과 늑대의 아름다운 동행, <산책>

by 김경애

산책의 즐거움

산책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숨이 약간 차게, 빠르게 걸어야 건강에 좋다 하지만, 저는 어슬렁어슬렁 걷기를 즐기지요. “모과는 몇 개나 열렸나? 리아트리스는 이제 지고 있군...” 중얼거리기도 하면서요. 자연은 사람들이 알아챌세라 매일 살금살금 작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며칠 전 산책에서 보라색 나팔꽃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어릴 적 고향 동네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꽃이지요. 꽃 하나가 빛의 속도로 저를 어린 시절로 데려가 줍니다. 산책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죠. ‘산책’은 단순히 걷는 일이 아니라 주변을 느끼고 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임이 틀림없습니다.

여기 겨울 숲으로 산책 나온 꼬마 곰과 꼬마 늑대가 있습니다. 그것도 눈 내리는 고요한 겨울밤에요. 우연히 만나 함께 걷는 꼬마 철학자들을 만나러 가볼까요?


곰과 늑대의 조용한 동행

어느 고요한 겨울이었습니다.

깊은 밤 숲 속에는 눈송이들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곰은 산책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새하얀 눈밭 저쪽에 누군가 있습니다.

늑대도 산책을 나왔습니다.



곰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꼬마 늑대였지요. 뾰족한 주둥이, 빛나는 회색 털, 황금빛 눈동자, 촉촉하고 까만 코를 보고 알았습니다.

늑대도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꼬마 곰이었지요. 크고 둥근 머리, 보드랍고 까만 털, 그윽한 갈색 눈동자, 촉촉하고 까만 코를 보고 알았습니다.


아! 곰과 늑대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둘 다 촉촉하고 까만 코를 가졌네요.


길을 잃었냐고 묻는 곰에게 늑대가 대답합니다.

“난 눈을 밟으러 나왔어. 눈 밟을 때 나는 소리를 좋아하거든. 뽀드득뽀드득”


늑대가 곰에게 묻습니다.

“난 찬 바람을 쐬러 나왔어. 눈 내리는 고요한 숲을 좋아하거든.”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좋아하는 늑대, 눈 내리는 고요한 숲을 좋아하는 곰! 잘 어울리는 단짝을 만났네요. 이렇게 멋진 산책의 이유를 대는 어린 친구들이 저도 단박에 좋아집니다. 둘은 함께 걷기로 합니다. 그림책의 여러 장면 중에서 가장 제 마음에 든 그림입니다.




그림책에서처럼 곰과 늑대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곰과 늑대는 생태계에서 서로 어떤 관계야?’ 챗 GPT에게 물어봅니다. 곰과 늑대의 작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답을 주네요.

곰과 늑대는 생태계에서 보통 ‘경쟁자’ 관계라고 볼 수 있어요. ��

둘 다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기 때문에 순록, 사슴 같은 먹이원이 겹칠 때가 많습니다. 극히 드물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곰과 늑대가 같은 사냥터에서 큰 갈등 없이 먹이를 나눠 먹는 모습도 관찰된 바 있습니다.'


음.... 서로 다르지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이군요.

곰과 늑대는 함께 눈밭을 걸으며 눈과 귀와 코로 눈 내리는 풍경을 느낍니다.


곰과 늑대는 젖은 나무껍질 냄새를 맡았습니다.

눈송이가 털 위에 내려앉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곰과 늑대는 이따금 멈춰 서서 눈송이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새 한 마리도 날아와 나란히 걷고 있는 곰과 늑대를 바라보네요.


넓은 들에 다다르자 눈이 잦아들었습니다.

곰과 늑대는 여기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여름이었지요. 숲은 온통 초록이었고 온갖 소리와 향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곳은 넓고 푸른 호수였습니다.

지금은 넓은 얼음 들판이 되었습니다.



“난 이제 가야 해. 동굴로 돌아가서 겨울잠을 자야 하거든” 곰이 말했습니다.

“나도 돌아가야 해. 순록 냄새를 따라가는 중이었거든. 긴긴밤을 달려야 할 거야.”

늑대가 말했습니다.

“함께 걸어서 정말 좋았어” 곰이 말했습니다.

“나도 너랑 같이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늑대가 말했습니다.

곰과 늑대는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길로 떠났습니다.


많은 대화나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알게 해 주네요.


곰 가족은 동굴 속에서 깊은 겨울잠을, 늑대 무리는 묵묵히 순록을 쫓으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눈이 녹고 새싹이 움트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왔습니다. 온갖 소리와 향기로 가득 찬 숲 속을 곰이 걷고 있네요.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누군가 보였습니다.

곰과 늑대는 살랑거리는 봄바람 속을 함께 걸었습니다.

눈과 귀와 코로 숲을 느꼈습니다.

숲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담박한 우정을 꿈꾸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다니엘 살미에리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여러 권의 그림책을 그리고 만들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기도 했다네요. <산책>은 저자가 글과 그림 둘 다 혼자 한 첫 작품이랍니다. 영어 원제는 Bear and Wolf.

그림도 글도 심심하고 밍밍한 이 그림책이 왜 좋지?’ 가만가만 제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쉽게 답을 찾았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숲 속을 꼬마 곰과 늑대와 함께 저도 뽀드득뽀드득 걷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입니다. 아무 말 없이 나무껍질 냄새를 맡으면서요. 그림책을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고요함’에 젖어들고 차분해지네요. 멋진 경험입니다.


요란하지 않은 담박한 우정을 꿈꾸어 봅니다. 비록 곰과 늑대처럼 다른 개성을 지녔더라도 서로 인정하면서요. 살랑거리는 봄바람 속을 함께 걸으며, 눈과 귀와 코로 조용히 숲을 느끼는 그런 우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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