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운명이 바뀌다. IMF세대의 탄생과 최초의 청년실업대책
2018년 11월, ‘국가부도의 날’ 영화가 개봉되었다. “11월, 모두의 운명을 바꾼 그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라는 포스트에 눈이 멈추었다. 1997년 11월 21일, 외환위기로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전환된 날이다. 그날은 91학번 청년의 운명도 바뀌었다. 한 청년의 운명뿐이었겠는가?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하여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대우그룹도 외환위기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워크아웃 후 해체됐다.
IMF 외환위기와 함께 날아든 ‘합격 취소’ 통보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설상가상이었다.
1967년 대우실업에서 출발한 지 30여 년 만인 1998년에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까지 성장했었다. 1989년에 김우중 회장의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제목은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세계로 웅비하는 꿈을 꾸게 하였다. 무역학과 91학번인 나의 가슴에도 불씨를 심었으리라. 무역학도에게 외교관 비자가 발급되고, 전 세계의 무역관에서 근무해 볼 수 있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년간 학과 동기와 함께 둘이서 시험 준비를 했다. 영어와 경제학이 주요 과목이었다. 내게 KOTRA는 우물 안에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다리이자 날개였다.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나의 삶도 개척하고 싶었다. 아! 그런데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는가? 한해 내내 경제학 객관식 시험공부를 했는데, 경제학 논술문제가 출제되었다. 그것도 무관심하다 못해 기피했던 계량경제학이다. KOTRA 채용설명회에 함께 참석했고, 1년간 함께 공부했던 동기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함께 채용설명회를 들었는데, 둘 다 잘 못 들었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만, 할 수 없었다. 버스는 영영 지나갔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KOTRA 시험을 재수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버스를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나름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전자 입사였다. 학과선배의 권유로 준비해서 합격한 곳이 현대전자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프런티어(frontier) 정신’으로 신규 사업 진출 의지와 낙관적 미래를 보여주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현대전자의 TV광고가 매력적이기도 했었다. 연구실에 홀로 남아서 반도체경제학을 공부하며 정말 ‘프런티어’에 가겠다던 나에게 IMF 외환위기와 함께 날아든 ‘합격 취소’ 통보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설상가상이었다.
청년백수, 고용절벽, 'IMF 세대'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경주 현대호텔에서 ‘합격 취소’ 위로금을 받은 날은 한 장의 사진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가슴에 찍혀있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은 청년들이 줄을 이었다. 위로금을 받고서도 청년들은 호텔 앞을 떠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신문지를 얼굴에 덮어쓰고 누워있는 청년들이 푸른 잔디밭을 채웠다. 청년들의 얼굴을 덮은 신문지 위로 햇빛은 서럽게 부서져 내렸다.
청년 백수(白手)라는 표현이 회자되었다. 캠퍼스 어디에서도 대기업 구인공고는 고사하고 중소기업 구인공고도 눈을 씻고서도 찾기 어려웠다. 지방의 국립대만 하더라도 ‘90학번 선배까지는 삼성, 현대, LG 대기업 입사원서가 학과 사무실에 쌓여 있었고, 성실히 서류만 작성하여 제출하면 대부분 합격하던 시대였다. ’91학번의 시계는 고용 절벽 앞에서 모두 멈추었다. 하루아침에 다른 시대에 던져진 것 같았다. 세대적 단층이 생겼다. ‘IMF 세대’는 내일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탄생하였다.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이다. 기업의 도산과 구조조정 등을 겪으면서 일자리 급감, 일자리 질의 하락,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일자리 양극화 등이 본격화되면서 청년실업의 문제가 심화되었다. 청년실업률은 1990년대 중반에는 4.6%까지 하락하였으나 경제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12%까지 증가하였다. 이후 경제회복과 실업대책에 힘입어 청년실업률은 2002년에 6.6%까지 하락하였으나 2003년 하반기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청년실업 문제가 고착화됨에 따라 2003년 9월 노무현 정부에서 공공기관 일자리 확충을 주요 골자로 한「청년실업 종합대책」을 발표하게 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특화한 청년정책의 시초이다. ‘청년실업해소특별법’이 제정(2004. 3. 5)된 것도 이 시기이다. 청년 미취업자에 대한 국내외 직업능력개발훈련 등의 지원을 통하여 청년고용을 촉진하고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사회안정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시행된 ‘청년실업해소특별법’은 이후 2009년 10월 ‘청년고용촉진특별법’으로 개정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청년실업이 만성적인 구조적인 문제로 고착되면서 ‘실업해소’가 아닌 ‘고용촉진’으로 더 강화되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은 본래 유효기간이 있으나 지난 2018년 11월 6일 국무회의에서 이 특별법의 유효기간을 2023년 말까지 연장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