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처음은 있다

신입이 경력자가 되기까지

by 크리스틴

소프트웨어 속에 갇혀본 적이 있다. 웹 개발자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이직하고 처음으로 업무를 보던 날, 파워포인트의 하얀 여백은 내 눈에 망망대해로 보였다.




여백에 제목을 썼다 지우고 폰트를 키웠다가 줄이고 메신저로 잡담을 나눈다. 그러다가 애써 만들어 낸 개요 몇 줄을 다시 지웠다. 이런 것도 공포의 한 종류가 아닐까? 진도를 나가지 못하니 조바심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일었다. 조언을 구할 기획자나 기획업무를 알려주는 학원이 절실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개발자로 소스코드만 백업할 줄 알았지 각종 문서들이 필요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반나절 넘게 고민하다가 더 늦기 전에 개발 팀장님께 도움을 청했다.

"손을 어디서부터 대면 좋을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사용자에게 보여줄 화면부터 그려봐요. 그리다 보면 필요한 부분이 보일 테니 하나씩 채워가 보시구요. 제가 보기에 괜찮았던 기획서 샘플 하나 드려볼까요?"

친절한 답변이 감사하면서도, 잘하라는 압박으로 들렸다. 개발 팀장님은 내가 이력서에 기획자라는 포지션을 추가할 수 있도록 나를 믿고 받아주신, 이 회사의 기술 책임자다.

개발 팀장님과는 몇 년 전 함께 일했었다. 당시에 나는 퍼블리셔로 일하면서 내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마음 한구석엔 내 잠재력을 알아봐 주겠지-라는 자만심과 믿음이 있었다. 핵심 멤버로 팀을 꾸리는 스타트업에서 기획 경험이 없는 사람을 기획자로 앉혔다는 건 입장에 따라서 굉장한 행운이자 무모한 도전이었다.


대표님 면접에선 그간의 회사 경험을 앞세워 나 자신을 당차게 어필했다. 혼자 여러 명의 몫을 해야 할 테니 고생길이 훤하겠지, 연봉은 20% 이상 높여 불렀다. 또 그만큼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렇게 입사를 했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건 정말이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솔직히 기초 지식조차 없는 상황에서 기획서 샘플을 보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업무 공유 차원에서(어디까지나 개발자로서) 일정표, 기능 정의서, 화면 설계서를 대충 훑어본 게 전부였다. 흔한 문서양식 하나 가진 거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내 모습이 딱 그랬다.


지금의 나는 어떤 식으로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지, 보고받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자료를 찾아보면 도움이 될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걸 두고 짬밥이라고 하는 거겠지. 이참에 자랑 좀 하겠다 -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동료는 내가 입사 초기에 업무를 파악하고 기획서를 완성하는 걸 지켜보며 '와.. 저래서 경력자구나!'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더랬다.

내 경우, 기획 업무를 조언해 주는 사수가 없었다. 회사에 일관된 양식이 있어서 '우리 회사는 이렇게 쓰니까 참조해서 만들어보세요.'라고 해주면 조금은 쉬웠을 텐데. 그러나 현실에선 문서 히스토리 관리가 되지 않는 곳이 열에 여덟이다. 초기 버전 문서라도 간직하면 다행이지만 거기에 매이지 말라며 오히려 안보는 게 낫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신입이 경력자가 되기까지 필요한 경험은 무엇일까?

서비스의 본질을 꿰뚫고 집중하는 것,

내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논리와 설득력,

피드백을 수용하고 내 것과 융합시켜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문서 양식은 구성원 간에 이용/관리가 쉽도록 조직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시행착오를 거치며 서비스 히스토리를 파악하기,

실무자와 임원 양쪽의 고충을 이해하고 의견을 조율하기,

프로젝트의 전체 일정을 관리하고 마감일에 쫓겨보기,

닮고자 하는 서비스를 벤치마킹,

서비스가 초기 의도에서 멀어지는 결과물을 지켜보기 (음?),

마케팅, CS 등 기획/디자인/개발 외 다른 실무자들과 자주 대화하기 (꽤 어려운 일..),

기타 등등

줄줄 나열하다 보면 끝이 없지만 나는 한마디로 이렇게 묻겠다.

당신이 업무에 대해 고민한 양은?


얼마나 빠르게 많은 문서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결과물이 탄생하기까지 고민했던 시간의 양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이보다 더 나은 결론은 없을지, 서비스 본질과 멀어지진 않았는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면서 과거의 실수를 돌아보는 시간까지. 한마디로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의 재료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춰보는데 들이는 시간이다.


어떤 대상을 속속들이 알려면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한다. 고민하는 시간이 많다는 건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는다는 얘기다. 이런 애정은 월급이라는 간접적인 동력보다 누구보다 멋지게 만들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애정을 가지면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부분도 세세하게 챙길 수 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그건 항상 두렵고 어렵다. 두려움은 해본 적이 없음에도 잘하려는 욕심과 비교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그것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슬며시 날려주고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자. 가슴에 애정을 한가득 담고서 흰 여백을 방황하는 방랑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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