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에서 기획자로 넘어가기까지
주니어 웹 개발자였던 시절, 난 새 업무가 두려웠다. 간단한 이벤트 작업이나 루틴한 것이 아닌 처음 설계하고 시작해야 하는 업무가 특히 그랬다. 커다란 바윗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마음은 무겁고 머리는 멍해졌다. 코드 만지는 걸 좋아하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걸까?
"이번 2.0 버전 개편 작업은 강 대리님이 진행하시고, 혜나님은 구 버전 운영을 맡아주세요.
강 대리, 개편 작업 양이 많을 테니 혜나님과 적당히 나눠서 하시고."
개발팀은 매주 월요일 오후에 모여 회의를 한다. 구성원은 팀장님, 시니어 개발자 둘, 사원 둘로 총 다섯이다. 팀장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걸 못 해내면 어쩌지?', '신규 작업이면 내가 설계까지 해야 하나?', '사원이니까 대리님이 나한테 큰 작업을 맡기진 않겠지?'....
개발자라고 해도 일찌감치 copy&paste로 모든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걸 파악했다. 또, IDE 툴은 클릭 몇 번으로 편리한 작업 환경을 세팅해 준다. 지난 작업들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는 함수를 찾아 재활용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러니 굳이 하나하나 타이핑할 일도 많지 않았고 변수명과 컨센서스를 맞추면 되었다.
이렇게 날로 먹어도 뒤탈이 없었다. 회사란 늘 처리해야 하는 일이 쌓여있고 업무를 쳐내도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곳이니까. 기능이 잘 동작하고 결과값만 제대로 DB에 쌓이면 오케이! 업무다운 업무가 주어지면 겁이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로직은 대충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깜깜하다. 대충 감이 오는 수식이나 함수로 끼워 맞춰 보지만 맞을 리가 없다. 열심히 웹서핑을 해서 다른 사람의 작업 코드를 찾아본다. 비슷한 코드를 발견하면 후다닥 처리하고 또래 동료들과 치맥을 할 수 있다. 힌트를 찾지 못하면 그제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시작한다. 물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답을 찾으리란 보장은 없다.
가끔은 꿈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코딩을 고민하다가 잠들면 꿈속에서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환한 모니터 앞에서 고민하던 도중 불현듯 힌트를 얻고 잠에서 깼다. 내 무의식이 문제를 해결해주다니!! 이렇게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다음 업무를 받기 전까지 마음이 아주 가볍다.
당시의 나는 코앞에 닥친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지 내공을 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짬밥이 쌓일수록 업무처리 능력도 조금씩 늘었지만 궁극적인 방법이 되진 못했다. 코드 만지는 걸 좋아했지만 과연 개발을 좋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진정한 개발자가 되지 못했다. 매번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지만 이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했고 개발자로 불리는 게 좋았으니까.
나는 주니어 개발자였고 언제든 도움을 받을 사람이 곁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느덧 100줄짜리 오라클 쿼리문을 어설프게나마 짜게 되니, 요구하는 수준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이때부터 개발자가 내 적성에 맞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두 느꼈겠지만 이건 잘못된 질문이다. 적성에 맞는지 자문하기보다 '실력 있는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 할 마음이 있나?'가 맞다.
지금이야 프론트, 서버, 데이터베이스, 웹, 앱 등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2000년 대 초반만 해도 풀 스택 개발이 일반적이었다. 서버를 세팅하고 프론트와 서버단까지 건드렸지만 예전엔 지금처럼 복잡하진 않았는데.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에 발을 들여놓고 공부를 게을리했으니 모두 내 잘못이다.
이렇게 무지했던 중생은 개발에 더 이상 애정이 남지 않았음을 깨닫기까지 그로부터 몇 년이 더 걸렸다. 계기는 이렇다. 대기업으로 이직한 뒤 이 곳에 뼈를 묻겠다는 마음으로 개발 공부에 매진했다. 어느 순간, 나와 다른 개발자의 레벨 차이가 아주 극명하게 보였다.
'과연 내가 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개발을 취미 삼아 즐기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내 한계가 느껴졌고 자기 비하와 위로를 오가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가떨어질 때 즈음 새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오래되서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처럼 개발자란 직무를 떠나보내지 못하다가 그 끝을 직감했던 것 뿐이니까.
개발자로서 쌓은 경력은 기획으로 전업할 때 확실히 장점이 될 수 있다. 경력 기획자와 비교하면 내 조건은 턱없이 불리했고 기획도 항상 공부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전업을 하고 경력을 쌓으면서 확실히 배운 게 있다.
한 분야에 경험과 지식을 쌓으려면 반드시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 시간 동안 어려움에 부딪히고 깨지며 뒹굴어 봐야 한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결국 내 성장을 막는 것과 다름없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직무를 바라봐야 한다
오늘도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할 직장인들에 말해주고 싶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경험은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