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회사 이야기

신입의 거침없는 전사 메일

by 크리스틴

IT업계 최종 경력 15년 차. 나의 첫 회사는 여전히 짧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모 게임회사 운영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K팀장은 나의 첫 번째 팀장이었는데 그는 항상 노트를 손에 쥔 채 바쁘게 회의실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팀 내에서 업무 경험이 많은 팀원에게 신입의 업무 지시를 맡겼다. 지시를 해줘야 하는 팀원은 내 또래였고 업무에 자리를 잡은지 얼마 안 됐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는 내내 바빠 보여서 일을 나눠주고 관리하는 건 한눈에도 버거워 보였다. 나보다 며칠 앞서 출근한 동기와 메신저로 '우린 뭘 해야 하는 거지?' 속닥거리곤 했다.


내가 입사했던 즈음에 새 게임 런칭을 준비하며 갑자기 직원이 늘었고, 업무는 바쁜 사람에게만 몰렸다. 조금 짬밥이 있었다면, 상황을 관전하며 여유롭게 월급루팡 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회사는 월급 주는 직원을 그냥 놀려두지 않는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하지만 당시엔 어떻게든 일을 배우고 싶었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초조하고 불안했다.


가끔 던져주는 자잘한 잔업을 처리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거라도 붙들고 있을 땐 마음이 놓였다. 나에 비해 눈치가 100단이었던 입사동기 L양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내 생각엔, 얘네들이 지금 자기 밥그릇 챙기느라 바쁜 거 같아. 꼭 쥐고 안 나눠준다니깐?"

"보고서를 작성해서 넘겼는데 그걸 보는지 마는지도 모르겠더라고."

"어쨌든 돈 받으니까 하라는 거 해야지 뭐."

실제로 보고서에 피드백을 받거나 업무가 연결되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격주로 돌아가며 철야 모니터링을 했고, 마시면 밤새 힘이 난다는 신묘한 음료를 만들어 건배했다. 흡수가 빠르다는 포카리스웨트, 자양강장제 박카스, 비타민이 풍부한 오렌지 주스 등 이론적으론 훌륭한 배합이었다. 철야를 끝내고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면 자리에 앉자마자 스르르 잠에 빠졌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이 풀리면서 빠져나간 도시락 빈 통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조금 차렸다. 피곤 앞에서는 창피한 것도 몰랐다.


여름 한철을 어찌어찌 버티다가 사직서를 냈고, 팀장님과 입사 면접 다음으로 긴 티타임을 가졌다. 입장이 바뀌는 경계선에 서자 팀장님은 자신의 힘듬을 내비치며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짧게나마 들려주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퇴사 결심을 했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아서 아쉽다) 서로 이미지 관리에 들어간 시점이라 나도 퇴사 이유를 솔직하게 밝히진 않았다.


몇 달 후, 회사 경영지원부에서 전화가 왔다. 급여가 잘못 지급되었으니 다시 입금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내가 먼저 연락을 해주지 않았음을 슬쩍 질책하는 느낌마저 전해졌다. 뜬금없는 말에 놀라 은행에 달려가서 통장 내역을 찍어보니 퇴사 후에도 급여가 따박따박 찍혀있었다! 퇴사 후 돈을 다 쓰고 나서 잔액 확인은커녕, 인터넷 뱅킹 보안카드도 어디에 뒀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억울함이 북받쳐서 곧장 회사에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경영팀의 실수와 내 떳떳함을 밝히는 동시에 과거 나의 퇴사에 얽힌 부당함을 적었던 것 같다. 무슨 생각으로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전사 주소로 회사 전체에 메일을 뿌렸다. 여전히 근무하고 있던 내 입사동기는 회사 내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해주었다. 메일을 수신하자마자 조용히 팀장급 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한다.

다음 날, 경영팀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종각역 어느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전화상으로 풍기던 애매한 목소리가 한층 예의를 갖췄다는 걸 단박에 느꼈다. 그는 전산 상의 오류가 있었고 퇴사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시인했다. 사정을 고려해줄 테니 입금된 금액 70%를 돌려달라고 요청했고 나도 곧장 수락했다. 순간적인 기분에 휩쓸려서 전사 메일을 돌렸어야 했는지 내심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또, 나는 한창 돈이 필요한 20대 백수였다.


그렇게 사건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뜨끔하다. 입사동기를 비롯한 친구들은 조직에 대항하는 나를 향해 브라보를 외치고 엄지를 추켜세웠지만, 사실 어디가서 구경하기 힘든 재미거리를 연출해 준 덕분일 게다. 이후로 게임업계엔 발을 들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건 어찌보면 철없는 행동이 가져 올 나비효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추억이지만 그땐 모든 것이 현실이었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그렇게 대응하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현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모난 돌이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지금 같은 판단이 가능할 테니까. 사람일은 모른다고, 그로부터 9년 뒤 또 다른 게임회사에 입사했고 열정을 불태우며 일했다.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꼬박꼬박 이름을 부르며 친구가 되었던, 게임업계를 주름잡던 입사동기 L양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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