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화엄이라는 말조차 너무 좋아한다.
이유가 있기보다는 그냥 좋다.
화-華 화는 빛나다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는데 대게 화엄 할 때는 꽃이라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엄-嚴 엄은 엄하다 할 때의 엄 자인데, 여기서는 준엄하다는 뜻으로 쓴다고 한다.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하다는 뜻인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꽃에 비유한 것으로 이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에 경(經) 자를 붙이면 꽃처럼 장엄한 부처님의 말씀으로 수놓은 경전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 부처의 깨달음인 불심(佛心)은 우주 만물의 내재된 기본 가치임을 상기하면 온 우주가 특히 인간 세상의 중심인 각 개개인을 장엄한 꽃에 비유하고 그 꽃밭이 인간 세상이라는 논리로도 유추되니 다시 한번 그 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아름다운 그 자체인 화엄경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이자 불교사상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한다고 한다. 불교교리라 할 수 있는 삼법인에 첫 번째가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그 뜻은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 순간마다 생멸, 변화하고 있다.'라고 하는데 결국 일체유심조는 이런 우주 만물의 섭리를 뒤로하고 나(我)라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의 나의 아집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같이 변화는 존재인 나를 영원불멸의 절대적인 시각에서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잘못 바라보니 세상 모든 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일체개고(一切皆苦)까지 이어지는 불교교리 삼법인(三法印)을 이 일체유심조로 다 설명이 되는 듯하다.
이 일체유심조를 설명할 때 자주 회자되는 것이 그 유명한 원효대사의 이야기이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길에 해가 저물어 동물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밤중에 목이 말라 주위를 살피니 바가지에 물이 있길래 달게 마시고 다시금 잠을 청했다. 아침이 밝고 눈을 떠보니 지난밤에 달게 먹은 바가지의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닌가. 기겁을 하여 토악질을 하다 문득 생각하니 어젯밤 그토록 달게 마셨던 바가지의 물이 날이 밝자 해골의 썩은 물로 여겨 게워내고자 하니 어찌 지난밤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이처럼 다를까? 하지만 저 해골의 물은 그때와 지금 모두 같은데 말이다. 해골은 짧은 시간에 변하지 않았다고 한들 내 마음만 변해도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지는데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나를 찾고 만들고자 하니 어찌 괴롭지 아니하겠는가?라는 삼법인을 단 번에 깨달은 원효대사는 더이상 유학을 떠날 이유가 없어져 그 길로 돌아왔다고 한다.
해골의 물을 달게 마시는 원효대사
일체유심조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따라 해석하고 어리석게도 그 해석으로 날아갈 듯 기뻐하기도 하고 땅이 꺼질 듯 괴로워하기도 한다. 사실 알고 보면 현상은 하나인데 인식이 시시때때로 바뀌니 어찌 혼란스럽지 아니하고 괴롭지 아니하겠는가? 특히 인간 세상에서는 어떤 단순한 현상을 자의적으로 바꾸기가 너무나도 쉽기에 상처 주고받는 일들이 많아 스스로 괴로움으로 들게 하는 것들이 말 그대로 일상다반사인 것이다.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일체유심조의 마음인 각자의 마음대로 생각하기에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며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사는 우를 범한다. 일어나는 현상을 너무 자의적으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상대방이 나를 너무 무시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서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는지,,,,,,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먼저 모든 것을 오로지 내 마음으로 왜곡시키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겠다. 오늘 그리고 내일에도,,,,,,, 마음의 평온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