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겨운 나를 견디고 견디다, 결국 견디지 못한 날
의례의 대사, 혐오의 지문으로 가득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무대
큰 외삼촌 집에서 지내는 외할머니 제사라며 엄마 아빠가 왔어요. 엄마네 집은 아빠 쪽 집안에 행사가 있거나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늘 뒤로 밀리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갔습니다. 예전부터. 여자형제가 없는 엄마는 당신께서 결혼하기 전에 몇 년을 함께 살았어서 언니 삼아 지냈던 큰 외숙모를 보러 가는지도 몰랐어요. 당신 어머니 제사를 핑계 삼아.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핑계로 가지 않더니 이번에는 제사를 핑계로 근거리에 사는 나를 불러낼 모양이었어요. 큰외삼촌에게 전화가 왔어요. KTX를 타고 엄마가 할머니 제사에 올 거라고.
수원역은 평일에도 차 대기가 복잡해서 엄마가 기차를 타고 오면 큰삼촌이 늘 픽업을 갔었어요. 내가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걸 떠나서 애당초 삼촌은 저에게 어지간하지 않고는 아주 작은 심부름도 시킨 적이 없는 분이에요. 원래 부탁을 하는 분이 아닌데 굳이 전화를 건 이유가 짐작이 됐습니다.
결혼할 때 전 아빠의 손으로 건네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부 입장을 혼자 하겠다고 얘기했고 그 생각을 꺾지 않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었다며 삼촌이 전화해서 나무라시는 거예요. 아빠 멀쩡히 있는데 혼자 입장하면 사람들이 엄마가 재혼한 줄 안다고. 늘 나를 귀여워만 하는 삼촌이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땐 나는 아빠와 신부입장을 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어요.
엄마 아빠가 도착하고 차에 타자마자 어색함이 둥둥 떠다녔어요.
결국 내가 떠들 수밖에 없었다. 내내 조잘조잘 떠드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엄마와 아빠는 즐거운지 계속 웃었어요. 하지만 오히려 나는 내게서 나오는 유쾌한 목소리가 불쾌했습니다. 기분은 계속 다운되는데 즐거운 듯 떠드는 입이 쉬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어요.
아빠는 사교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싶어 하는 타입이지만 두루두루 고려해 이끄는 사람은 아니라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엄마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고 내 배우자는 예절 바르고 깍듯하지만 친한 소수의 사람 외에는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결국 떠들 사람은 나고, 내가 있어야 밥상에 수저 걸치듯 한 마디씩 얹어요.
삼촌 집으로 향한 차 안에는 온통 내 목소리만 가득했어요. 가끔 끼어든듯한 웃음이나 그랬지, 같은 감탄사가
고수들이 북을 두드리며 장단 맞추듯 했습니다.
한 시간 여를 떠들면서 삼촌댁에 도착했어요. 짐을 내려다 드리고 다른 친척들도 모여있어서 올라가서 인사를 하고, 잠시 앉아서 이런저런 근황을 묻고 듣다가 집으로 돌아왔죠. 사위가 이렇게 데려다주고 딸이 이렇게 챙겨주니 좋겠다며 놀리듯이 말하는 다른 삼촌들 사이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아빠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있었어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우리 큰 딸이 있어야 사람 사는 거 같다고 너스레처럼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한 시간 넘게 귓가에서 환청처럼 반복재생되었습니다.
그런 아빠도 너무 싫지만, 차 안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댄 나는 더 싫었어요. 내 주둥이를 권총으로 날려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기분을 꼭 쥐느라 손톱이 손바닥에 깊이 자국을 냈어요. 그러다가 앉아 있는 덩치가 작아진 아빠를 보면 아주 조금 측은지심이 들었다가 하며 감정이 널을 뛰었죠. 결국 펜 꽂이에 있던 뾰족한 연필이 허벅지에 꽂히고 그어지길 반복했습니다.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상비로 갖고 있던 신경안정제 하루 용량 전부를 다 삼켜버렸어요. 한 시간이 지나도 진정이 안 돼서 한 두 알을 더 먹고는 수면제를 삼켰어요. 빨리 자는 게 백번 나을 것 같아서.
오늘 고마웠다고 아빠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불쌍해하는 내가 이해가 안 되고 한 마디도 하기 싫고 끔찍해 죽겠는데 손이 답장을 해주고 말았어요. 겉치레하는 의례적인 좋은 말로만 써서.
감정의 진폭을 결국 견디지 못하고 휴대폰을 던져버렸습니다.
오늘처럼 내가 혐오스러운 날이 없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