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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이 주는 우울

나도 의존하고 싶지 않아

by 는개


치료를 하면서 알게 됐던 것 중에 하나는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외부의 자극에 약하고 너무나도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거였어요.

보통 그런 상처를 받게 되면 통상 3-4일 정도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고 괜찮아지는 패턴을 보였죠. 그런 현상이 지속됨을 얘기하며 그 기간을 어떻게든 버티면 괜찮아지고, 다시 자극이 일어나고 어떻게든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런 나날을 보냈어요.


재치료의 필요를 알고 한 시간 반이 걸려 다시 다니던 병원에 방문했을 때

재방문한 나를 보는 선생님은, 나를 반가워하지 못했어요. 늘 웃는 얼굴이셨는데, 웃지 못하시더라고요. 그날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평소도 그런 것인지 모르죠. 유난히 환자가 많아 너무 바쁘셨고, 사무적인 얼굴로 저를 대했습니다.(물론 나 때문에 가 아닌 상대방의 사정이다라고 연습했던 대로 머릿속으로 암송했다)


서운했어요.

그리고 그날 종일 우울했어요,

결국 서러워졌습니다.


선생님께 서운한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며칠간 저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비관적인 생각만 지속했어요. 내가 내 감정을 감추며 일을 하듯, 선생님은 그게 일이니까. 당신의 감정을 감추며 일하시는 거겠죠.


선생님은 의사니까...

그저 치료를 하기 위해 라포 형성을 하고, 저에게도 다른 환자에게 와 똑같이 했을 거예요.


저의 서운함은, 우울함은, 서러움은, 당연한 감정인 걸까요, 이상한 감정인 걸까요. 마를린 먼로도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담당 의사를 사랑했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 것 아닐까.


그냥 그렇게 된 거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저 나도 선생님을 많이 의지해서 그런 거라고.


슬프게 느끼는 내 감정은 그저 증상으로 비롯된 거다라고 연습한 대로 거듭하면서 그 기간을 보냈어요. 일주일이 가까운 동안 버티는 나날이 지속되었죠.


눈물을 참아 넘기는 마음과

우울한 마음을 버티면서

너무 많이 의지했다는 것을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아픈 건 아픈 거고, 별개로 기억을 더듬었어요.

선생님이 마음이 다쳐 우울로 더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라고 가르쳐 주셨었던 행동들을요..

기억이 날 만한 모든 것들을 눈앞에서 치우고, 감정이 올라오면 약으로 누르고, 일로 도망치라고 했었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렸어요.


이제 어느 정도 훈련이 된 머리가 손으로 명령을 내립니다.

카톡의 즐겨찾기에 박혀있는, 선생님의 이름을 해제했어요.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물음에 답장이 없는 선생님의 이름을.

카톡 채팅 목록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여러 사람에게 업무메시지를 보내 선생님과의 대화창을 밀어버리고, 생각을 안 하려고 일에 몰입했어요.


그리고 휴대폰에 딱 두 개, 등록되어 있던 긴급연락처에서도 해제했어요.

그 손가락 끝으로 선생님의 이름이 없어져버린 긴급연락처가 보이자, 등록했던 몇 년 전의 밤이 생각났어요.

한밤중에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고 선생님께 전화드리거나 선생님의 일상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할 수는 없어서 술을 먹다 먹다 한 새벽에 병원 건물을 찾아가 선생님의 진료실을 쳐다보며 쭈그려 앉아 울던 지난날이 생각났어요. 그 기억에 빠져 한참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났어요. 또 눈물이 났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머리가 자꾸자꾸 말했거든요.


마음이 아픈 것이 나아지지 않아 말로도 뱉었어요.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하는 게 맞아하면서요.


마지막으로 볼 생각으로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딱 한 번만 선생님을 보고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야지.

눈도 못 마주치고 벽에 고개를 기대고 앉은 나를 선생님은 쳐다보지 않았고, 전보다 좀 더 냉랭한 얼굴이었어요. 사무적인 얼굴의 선생님의 얼굴에 또다시 우울해지며 눈물이 흘렀어요. 사실은 나를 봤는지 보지 않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을 것이고 냉랭한 얼굴이라는 건 내 감정만이었을 거예요 (라고 머리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며 선생님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떤 것 같냐고. 지금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냐고. 그런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왜 배우자는 의지하지 않는 거냐고 물으셨어요.


그 물음에 저는 이런 나를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저는 저의 반려가 내게 실망하는 것이 싫었어요. 선생님은 의사니까 나의 이런 부분을 증상으로 여기고 치료할 부분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반려는 그냥 보통 사람이니까. 부모조차 형제조차 믿음이 안 가는데, 사랑이 얼마나 갈 줄 알고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른 완벽한 타인인 그를 믿을까요.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요.


제 반려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입니다. 자신감이 강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해요. 매사 신중하고 한번 내린 결정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든 끝까지 흔들리지 않죠. 혼자서 독야청청하는 스타일이에요. 그의 자존감이 아무리 낮아져도 제가 제일 높을 때 보다 훨씬 위에 있어요. 제가 왜 이러는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이해 못 하고 저를 관찰하고 제 행동을 외운 지식으로 제게 대처하는 그런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사랑만으로 저를 보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물론 더한 일에도 실망하거나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야 해요. 하지만 그건 짐작일 뿐이죠. 그가 지난 나의 모든 과거 곳곳에 있는 나를 버렸던 사람들처럼 혹시나 내게 질려한다면... 하고 가정만 해도 심장이 꽉 죄어오면서 바로 눈시울이 뜨거워져요. (물론 불안과 우울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 후 이성적으로 보면 그가 그러지 않을 것임은 학습돼서 알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한 장에 같이 나온 가족관계 증명서를 보고 처음 한 생각이 뭔지 아세요? 혹시 이혼하게 되면 법정에서 한 번은 만나게 될 테니까 아무 말 없이 연락 끊고 사라지거나 내가 싫다고 찾아가도 안 만나 주지는 않겠네... 였어요. 진짜 이상하죠...


인터넷에 검색해보지 않아도 보편적인 마음은 아닌 거, 알아요.

이전처럼 모든 말과 행동을 전부 검열하고 사는 건 아니지만, 검열을 안 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늘 휴대폰을 옆에 둬요. 바로 검색해 보고 내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고 판단이 되어야 안정이 되거든요.


선생님은 묻지도 않고 한 달간의 약을 처방해 주셨어요. 원래 살던 곳과 가까워서 다니던 병원이라 너무 멀어서 그렇다는 걸 알지만 씁쓸했어요.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다시는 오지 말라는 메시지처럼 보여서 우울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며칠을 굳어서, 애써 웃는 얼굴을 하며 부러질 듯 버티고만 있다가 반려에게 물었어요.

의존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무 가벼운 말투로 그게 뭐 어때서,라고 되묻더라고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혹시 그 선생이 그런 말을 했냐며 덧붙였어요. 이전에 한 번 언급했을 때, 네가 싫어해서 그 이후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라고 입을 떼었어요.


그 의사선생은 친구가 아니지 않냐고, 그 사람도 자신의 생활이 있는데, 의사로서 일을 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하고 있지 않겠냐고. 너무 믿지 말라고 얘기했던 것 기억 안나냐고. 치료가 끝나면 친구사이가 되는 거냐고. 그렇지 않지 않냐고.


그저 그녀는 의사일 뿐이고,

너는 환자일 뿐이고.

그것뿐이라고.


네가 뭘 잘못해서 냉랭한 태도를 보인 것 같냐고. 아니라고. 그냥 그렇게 끝날 인연인 거라고. 여지까지 너와 인연을 맺었다가 없어진 사람들도 다 그런 거라고. 앞으로도 많은 인연이 올 거고 또 끊어질 거라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절대 네 탓이 아니라고. 낮은 목소리로 내게 크림처럼 얘기했어요.


나는 그런 반려를 끌어안고 누가 변할지 어떻게 아냐고, 우리도 변할지 모르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물어요.

결혼했고 혼인신고까지 했는데 도대체 뭘 못 믿는 거냐고.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사별을 할 수도 있고... 하던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오자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냐고. 그래서 처음으로 이에 대해서 솔직히 털어놓았어요.

대체 왜 이렇게 생각이 흘러가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그러자니 얘기해요. 내가 어딜 가냐고. 나 안 떠난다고.

나를 의존해도 된다고.


저는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 말에는.

하지만 뭔가 묘했어요.

잃고 싶지 않아 바닥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뭔가 마음에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그래도 지난 3년 간이 무색하진 않았더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아예 방안에만 있었을 텐데.

마음이 아픈 건 아픈 거 대로 놔두고, 병원을 옮겨야지.

새로운 병원을 찾아, 새로운 선생님을 찾고...

이제는 정말 치료를 시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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