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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와 함께 있는 지금

별거 아닌 게 아닌 지금

by 는개


경과를 기록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울이와 함께 있는 지금을요.


치료를 시작할 때는 괴로움에 치여 몰랐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덩어리 진 내 감정이

어느 정도는 언어로 표현이 되는 걸 발견했어요.

전부는 아니지만.


오늘은 처방해 가지고 온 약 중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양의 약을 다 먹었어요.

아침 약, 필요시 약, 저녁 약, 필요시 약.


그 모든 약을 먹고 일하는 시간을 버텨냈어요.


일할 때의 나는 명랑 쾌활한 이미지예요.

평소 텐션이 높은 편인 내가 가라앉은 모습을 보였지만 일터에서 딱히 이상하게 보는 이는 없었어요.

다행이었죠.



*



맥주를 마시며 집에 있는 종이책 중

마음이 아프지 말라고 말하는 책들을 집어 들었어요.

아이패드를 가진 뒤로부터 거의 전자책만을 읽었기 때문에 전자책 서재에 훨씬 많이 있겠지만 오늘은 만져지는 책을 읽고 싶어서 이것들을 꺼내 들고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었습니다.


약이 소용없게 눈물이 차올랐어요.

아니, 약이 소용이 있는 건지 흘러내리지 않았어요.

지금쯤은 흘러내려야 하는데.


우울이는 떠나지 않았더라고요.


이사를 하고, 많은 것들이 바뀌면서

그저 거기에 적응하느라고 신경을 뺏긴 건지,

둔해서 몰랐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너무 더디게 가고 있었어요.


오늘도 오늘 앞에 너무 무력했습니다.

오늘에 또 패배하고 방구석에 주저앉아

몸을 조그맣게 말았습니다.

내가 너무 싫어......


너무너무 싫은 나를 똑바로 보기가 힘들어 습관처럼 왜곡된 시야를 가지기를 택했습니다.

술을 얼마나 마셔야 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어 끝없이 끝없이 들이켰어요. 마시고 있는 흑맥주가 물 없이 먹는 가루약처럼 너무 썼어요. 순간 쓰다,라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너무 쓴 맥주가 마음에 들었다.

쓴 맛이 없어지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졌어요.


약을 더 먹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맥주를 더 먹고 좀 더 흘러내리지 않는 눈물을 꾹꾹꾹 참았습니다.


나아지지는 못했어도,

지난 시간 동안 그래도

세상에 숨기며 살아가는 방법은 익혔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삶이 살아질 수 있으니까.


우울이와 함께는 같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팔에 커터칼을 마구마구 긁어대던

이전보다는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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