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종아리에 해적선 문신 있는 신부님
스위스 호스트 루이스네 집에서
이탈리아 호스트 돈자니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기차를 무려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했습니다.
취리히, 밀라노, 피렌체 기차역에서 빠르게 환승을 했습니다.
제가 머리를 좀 더 굴렸더라면,
돈자니와 만나기로 한 날짜를 조금 더 미뤘을 텐데요.
유명한 도시를 지나가는 김에 잠깐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 머물러,
관광지 몇 군데만 돌아볼 걸 그랬습니다.
호스트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어 그 생각을 못했네요.
어쨌거나 기차만 5번 환승해서 가는 걸 보니
또 다른 외딴 마을로 잘 찾아가고 있나 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호스트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거대한 배낭을 멘 외국인이 이곳에 내린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냐며 누구라도 물어볼 법한 기차역이었죠.
조금 전에 머물렀던 밀라노나 피렌체 기차역과는 차원이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죠. 마땅히 앉을자리도 없는, 그렇다고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기도 뻘쭘한 공간.
"Yoon?"
그 순간, 제가 상상하려 했던, 하지만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호스트 돈자니가 나타났습니다.
두툼한 노란색 패딩을 입은 덕에 안 그래도 육중한 몸집과 큰 키가 더욱 돋보였죠.
인중과 턱 전체에 뒤덮인 짧고 곱슬한 검회색 수염까지, 흡사 영화 <테이큰>에 나올법한 마피아 보스 같았어요.
그 옆에는 건장한 체격의 장발 동양인과 긴 머리를 이마 위로 멋스럽게 묶은 마른 서양인이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간단히 서로 이름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한 뒤, 호스트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갔죠.
분명 제 앞에 있는 호스트는 마피아 보스 같았어요. 거대한 덩치에 덥수룩한 턱수염까지.
딱 기관총을 실은 검은색 SUV 정도는 몰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그는 새빨간 소형차 문을 열었습니다.
잠깐, 이건 너무 반전이잖아?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돈자니 씨는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차 안에서 여러 대화를 하던 도중, 저는 호스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어요.
어렴풋이 Parish(교구)라는 단어를 프로필에서 봤는데, 직업에 대한 소개는 없었거든요.
"글쎄. 나는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 매일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청소년을 만나고, 마을 성당을 관리하고 있어."
그의 말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는 듯 수차례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오른손으로 스마트폰을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모습을 보니, 분명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니더군요.
그런데, 평지도 아니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 손으로만 운전한다니!
조수석에 앉은 저는 수십 개의 코너를 돌 때마다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심장이 요동쳤습니다.
룸미러에 묶여 있는 십자가 묵주도 심하게 흔들흔들.
분명 예수님도 멀미를 느낄 거친 운전이었죠.
워낙 하는 일이 많으니 저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스무고개를 하는 것 같았어요.
프리랜서일까. 어떻게 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직업인 걸까요?
보다 못한 론(아까 머리를 멋스럽게 묶은 서양 친구)이 뒷자리에서 속삭였습니다.
"윤. 돈자니는 신부야."
"뭐라고? 신부?!"
저는 뜻밖의 대답에 놀라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마피아 보스가 신부님이라고? 잠깐만.'
제가 한국에서 봤던 신부의 이미지와 돈자니는 너무나도 달랐어요.
한국에 있는 신부는 약간 마른 체격에 단정한 헤어스타일 아니던가요?
돈자니는, 그러니까 마동석만한 남자가 자기를 신부라고 소개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안 사실 하나, 그의 왼쪽 종아리에는 해적선 문신도 있었다)
무엇보다 제가 놀란 이유는 신부라는 존재가 정말 반가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 초중고등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 바로 성당이었어요.
호스트가 신부라면 제가 지낼 곳도, 일할 곳도 모두 성당.
외국에서 한인 타운에 간 것처럼,
저는 낯선 문화에서 익숙한 것을 찾았습니다.
호스트와 지내는 건 정착에 가깝거든요. 정착하면 유랑이 그립고, 유랑하다 보면 정착이 그립고.
저는 두 호스트를 연달아 만나는 바람에 정착 생활이 꽤 길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