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태도가 되는 사람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아끼는 하얀색 니트에 보풀이 생겼길래 보풀 제거기를 꺼내 들었다. 동생이 선물 받아온 건데 간단한 사용법 치고 효과가 좋아 보였다. 전원을 켜니 '윙' 소리가 났고 니트에 대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니 보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강아지 털 깎는 기분이 이런 걸까 재미를 보던 찰나, 어느새 새로 산 니트처럼 제법 깔끔해 보였다. 그런데 동생이 썼을 땐 소리가 꽤 요란했는데 그새 성능이 떨어진 건지 소리가 조금 작아진 것 같았다. 혼자 필터를 비워볼까 하다 아무래도 동생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거 보풀 제거기 어떻게 비우는 거야?"
마침 방으로 들어온 동생에게 물었다. "배터리가 다 된 건지 보풀이 다 찬 건지 예전만 못한 거 같네. 소리도 좀 약해진 것 같고." 동생은 제 앞으로 보풀 제거기를 가져가더니 살펴보기 시작했다. "배터리 간 지 얼마 안 됐어. 보풀도 별로 안 찬 거 같은데.." 그러면서 기기 위아래를 분리시켰는데, 별로 차지 않은 것 같다던 필터에 강아지 털 같은 보푸라기가 가득 넘쳤다. "허! 이게 뭐야? 하얘서 비어있는 줄 알았더니 완전 꽉 차있었네?" 이렇게 많이 들어 있는 건 처음 봤다며 이번엔 동생이 내게 물었다.
"아니, 왜 그동안 비우질 않았어? 모르면 물어봤어야지."
비우는 방법을 몰라서 물어봤는데 왜 비우질 않았냐니, 당황스러웠다. 쓴 거라곤 두 번이 다인데, 이렇게 필터가 가득 찰 때까지 비우지 않은 것도, 몰랐는데 물어보지 않았던 것도 전부 내 잘못처럼 들렸다. 오히려 나보다는 엄마께서, 동생이 더 많이 썼을 것 같아 억울하기까지 했다. "아니, 그래서 물어본 거잖아. 몰라서 물어봤는데 왜 비우질 않았냐니."
동생은 나의 태도가 문제라고 했다. 잘못을 하면 사과를 해야지 항상 도리어 화를 낸다고 했다. 나는 처음부터 화를 낸 건 아니라고 했다. 먼저 나를 죄인 취급해서 그런 거라고, 항상 생각 없이 말을 하니 화가 나게 되는 거라고 항변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다투듯 서로 날 선 말만 오고 갔다. 결국 보풀 제거기 하나 비우려고 했다가 서로에게 비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사 와서 10년이 넘도록 쌍둥이인 동생과 한 방을 쓰면서도 좁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주고받았던 말과 싸늘한 분위기만 맴도는 이 공간이 갑갑하게만 느껴져 방에서 나와버렸다. 그때 아빠께서 동생에게 약속 장소가 같은 방향이면 차로 함께 가자 하셨다. 동생은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아침에 내가 쓰는 휴대용 핸드크림이 올리브영에서 파냐고 물었던 게 떠올랐다. 핸드크림이 다 떨어져 역 근처에 잠시 들렀다 가려고 했던 모양이다. 동생은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집에서 쓰는 대용량 핸드크림을 집어 들어 가방에 넣었다. "하루 정도야 괜찮겠지"하고는 말이다.
분명 동생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는데 동생이 신경 쓰였다. 결국 눈치를 살피다 내 휴대용 핸드크림을 동생 가방에 넣고는, 보기만 해도 무거운 대용량 핸드크림은 책상에 빼두었다. 아빠와 같이 나가려고 외출 준비에 여념이 없던 동생의 뒷모습에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외출하려는 동생 앞에 기웃거리다 나가는 현관문까지 배웅했을 건데 오늘은 그러지 못할 것 같아 안방 화장대로 갔다.
괜스레 머리만 매만지고 있는데 뒤에 인기척이 들렸다. 동생이었다.
"가방 안에 핸드크림 뭐야?"
"쓰라고."
마음은 그게 아닌데 할 말만 겨우 툭-하고 나왔다. 동생은 그제야 얼굴에 매단 가면의 끈이 풀어진 사람처럼 "고마워!!!!"하고 본래 애교 어린 말투로 어리광 부리며 말했다. 나도 그 목소리에 이기지 못한 척 현관으로 앞서 나가는 동생을 따라갔다. 동생은 다녀오겠다며 씩씩하게 문을 열었는데 아직 서운함이 남았는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얼마나 생각하고 말하는데! 그 말, 내가 우리 반 아이들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인데.."
울먹한 얼굴을 보이고는 이내 문을 닫아 달아났다. 동생은 유치원 교사로 6년째 일하고 있다. 동생은 아직 어른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의지와 사명감이 대단한데 '생각하지 않고 말한다'는 말이 꽤 깊이 박혔나 보다.
닫힌 건 문인데 왜 내 마음이 찡-한 건지 언젠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으로 말했던 게 떠올랐다. '감정이 태도가 되는 사람'. 자신의 감정이 곧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되는 사람. 본인 행동으로 하여금 상대방이 상처 받을 줄 알고도 자신의 감정을 구태여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듯 자신에게서 시작된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까지 삼켜버리려는 나약한 사람.
난 동생이 그 말로 상처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서 동생에게 비수를 꽃아 버렸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소중하게 대할 줄 모르고 기분이 상해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싫다고 이야기했었는데, 나조차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똑같이 아프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내게도 있었구나, 드러나니 숨고 싶었다. 어쩌면 알면서도 계속 피했던 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아니라고 외면했던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인정해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