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Jeongseon Oct 01. 2024

저것은 깃발이 아니다

깃발을 보았다. 지금 진행 중인 이란 여성들이 히잡 착용의 자율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면에서 나는 깃발을 보았다. 하늘 가득 넘실거리는 그 깃발은 그러나 깃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히잡 착용 의무화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자른 머리카락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클라이밍 대회에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채 경기를 한 선수는 당국으로 이송된 후 무수한 소문이 돌았고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히잡이 벗겨졌고 무사귀환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갑자기 전해왔다. 히잡을 쓰지 않았고 저항했다고 실종되고 죽어가는 중에 저 소식의 행간이 읽혀 무서웠다.


지난 토요일 23일에는 <제주 퀴어퍼레이드 2022>가 열렸다. 코로나 시국에 몇 년을 공백으로 있다가 드디어 성소수자들이 모여 자유롭게 햇살 아래 설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사정으로 인해 뒤늦게 친구와 약속을 잡고 행진 시간에 맞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환호와 자유와 평등의 냄새를 담뿍 마시며 두 팔 벌려 달려갔다. 행사장 초입에서 기다리던 친구와 인천 퀴어퍼레이드를 맡았던 친구와 다른 활동가 친구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웃었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 얼굴을 보고 잠시 울었다. 가는 길 내내 소수자를 다뤘던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의 곡을 들으며, 울지 않게 곁을 지킬게, 같이 있을게, 다짐했다.


행진이 시작되고 깃발들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공권력은 이날 우리가 가는 길을 내내 지켜주었다. 과격한 혐오 세력을 몸으로 막아내는 장면도 보았다. 기도하거나 저주하며 행사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더 큰 가운데 그들이 스피커로 찬송가를 울렸다. 거기에 맞춰 우리는 함께 그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외쳤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 이긴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하늘은 흐렸지만, 뜨거운 열기로 땀방울이 흘렀다. 모자를 벗고 마음껏 춤을 추며 노래하며 외쳤다.



다시 “우리가 여기에 있다.” 이 말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울렸다. 존재가 틀렸다고, 사는 방식이 틀렸다고, 죄악이라고, 불법이라고 말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니다, 존재는 틀릴 수 없고 다를 뿐이다, 사는 방식은 누구나 다 다르다, 우리는 사랑이다, 사랑은 불법이 될 수 없다고 들려주는 말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해서 과거의 현실과 작금의 현실을 오독한다. 종교의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 거기에 적힌 율법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류에게 알려주는,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목소리였으리라. 이것이 사랑의 방법이라고. 하여 세대를 지나 예수에 이르면 마침내 선포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성경에는 정죄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할 일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은 시대와 현실과 현장에 맞춰서 진보하고 있는데,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존엄을 존중하고 있는데 근본주의자들은 똑같은 모습을 강제한다.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을 죽여라.’, ‘남자와 관계한 남자를 죽여라.’ 그러면 묻고 싶다. 왜 수많은 무슬림 중에서도 중동을 벗어나면 여성들의 히잡 착용은 자유로운가. 왜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지 않았는가. 왜 번식하고 창대하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과 달리 사도 바울조차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는가.


깃발이 나부낀다. 저것은 깃발일 수가 없다. 저것은 목숨이고 저것은 자유고 저것은 평등이고 저것은 사랑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지 근본주의 교리가 말하는 주장을 실천하기 위해 무고한 사랑을 정죄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다시, 저것은 깃발이 아니다. 저것은 존엄이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게재되었습니다.

이전 06화 페미니즘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