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의 힘
오늘 아침 등원길에 이웃분을 만났다. 우리 아이가 태어나서 이렇게 자라난 것에 놀라시며 본인 자녀분의 이야기도 해주셨다. 듣다 보니 나와 그분의 따님은 서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그런데 이름도, 얼굴도 서로 모르는 사이. 우연에서 인연으로 넘어가는 스토리에 나와 이웃분은 놀라며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창생의 근황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XX 전문대학원 나와서 OO로 일해요.
우리가, 그리고 이 사회가 선망하는 바로 그 전문직이었다. 참고로 나의 고등학교 같은 계열 동창생 대부분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나도 한때는 그 직업에 종사하기를 희망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포기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졸업 후 약 20년이 지나고 극명하게 갈린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 이 간극을 느끼며 나의 발작 버튼은 눌리고 말았다.
발작 버튼이라고 표현했지만, 친구를 향한 시기가 전혀 아니다. 나의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회한 내지는 괴로움이랄까?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답답함과 후회, 그리고 무기력했던 시간들에 대한 체기.
"발작버튼"이자 오랫동안 묵혀 온 내 안의 그것. 나는 진로 이야기만 나오면 인생의 패배자였다. 고등학교 같은 계열 친구들이 대부분 그 직업 종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사실 나는 수능이 끝나고 재수를 하면서 진학 분야를 180도 다르게 틀었고 친구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빠른 길로 진학/취업을 하고자 했던 나의 선택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다. 물론 내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었겠지만 지독히도 일이 풀리지 않았다. 마치 마녀의 저주처럼. 게다가 취업 시즌에 준비 없이 쳤던 배수의 진은 나를 늪으로 더욱 빨아들였다. 간신히 늪에서 나왔을 때 나에겐 아무런 선택지도 없었다. 차라리 그때 '그 늪의 바닥이라도 내디뎌 볼 걸 그랬나?' 싶기까지 하다.
정말 오랜 기간을 헤맸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재수 때부터 진로를 성급히 바꾸지 말았어야 했다. 차분히 고민해서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나의 적성을 찾고 미래에 일하고 싶은 분야를 진득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글로벌을 외치며 영어를 비롯해 모든 것에 능통한 Generalist를 찾던 사회는 지금, 한 분야에 깊이 있는 Expert가 되어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렇게 시대 인재상은 급변해 버렸다.
당시 트렌드에 맞춰 나의 것을 지우고 세상이 원하던 것을 좇던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현실에 안주하는 선택을 했고, '여자 나이'라는 틀에 갇혀 늦게나마 결혼을 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가까스로 노산은 피했다.
한동안 직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아오고 있었는데.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무얼 하고 살았는지,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현타가 왔다.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며 이 이슈에 많이 무뎌진 줄 알았으나 내 마음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빨리 마음을 다잡고 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됐다. 집에 돌아와서 러닝을 하러 갈까 고민도 해봤지만, 트랙 위를 울며 달릴 내 모습이 예상됐다. 그래서 뛰려던 계획을 접고 아침에 못 마신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카페에 갔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내일은 아이 소풍날이라는 사실이 번뜩 생각났다. 나는 부랴부랴 도시락 재료를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장바구니도 없이! 역시나 내 미니 숄더백에 브로콜리와 당근, 단무지 등을 욱여넣고, 다른 한 손에도 잔뜩 물건을 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집안 정리며 글쓰기와 독서 등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할 일을 붙잡고 내 일상을 이어나갔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일과를 보내고, 하원 전 나에게 허락된 마지막 시간을 위해 영어 필사를 하려고 필사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You must be sure of two things: you must love your work, and not be always looking over the edge of it, wanting your play to begin. And the other is, you must not be ashamed of your work, and think it would be more honorable to you to be doing something else. You must have a pride in your own work and in learning to do it well.
- Geroge Eliot의 소설 <Middlemarch> 중에서.
<해석>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당신 본인의 일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넘어서는 다른 역할을 시작하길 바라서는 안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동시에 다른 일을 할 때보다 지금 하는 일이 더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라. 그리고 그 일을 잘하려고 배우는 데에 긍지를 느껴야 한다.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이 영어 문장들이 촌철살인으로 느껴졌다. 이보다 나를 더 겨눌 수는 없었다. 이 페이지를 필사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감정의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침에 느꼈던 폭풍 같은 감정들은 이제 나를 빠져나갔다. 거기에 덧붙여 브런치에 내 부끄러운 과거와 솔직한 마음을 쏟아냈더니 더 이상 발작버튼에 눌리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상에서 행해오던 루틴 덕분이었다. 모닝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며 글을 써오던 나의 습관들. 이 루틴의 힘이 오늘의 나를 살렸다. 아, 평소에 주부로서 장을 보고 정리하던 일도 포함해야겠지? 역시 몸을 움직이니 고였던 생각이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진로라고 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으나, 최근 들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그리고 지금 그 방면으로 정진하면서 걸어가는 중이다. 어차피 무에서 시작하는 터라 리스크도 방어선도 없다. 배수의 진을 칠 필요도 없다. 그저 편안히 내 할 일들을 묵묵히 이어오고 있다.
가끔 들려오는 동창들의 소식에 위축되기는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자긍심을 가지고 나의 일을 해보려 한다. 주변 상황이나 사회적 평가에 굴하지 않고서 말이다. 성과나 결과에 조급한 마음 때문에 손바닥 뒤집듯 내 결정을 바꾸지도 않겠다.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장기 레이스를 펼치려 한다. 내 인생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