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평일 저녁.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했다. 남편은 잠깐 편의점에 다녀온다고 나갔다. 호두는 혼자 사브작사브작 거실과 방을 오가고 있었다. 나는 가끔 애가 어디 있는지 쳐다보며 부엌 정리를 다 해갈 때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분명 들어본 적이 없던 소리였다. 그 짧은 순간에 애가 다쳤음을 거의 확신하며 방으로 뛰어갔다.
호두는 울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를 멀뚱히 쳐다보길래 나는 '괜찮아?'라고 물었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던 내 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애는 울기만 하고, 도저히 어디를 다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애가 탔다. 다친 데가 머리인지, 입 안인지, 여기저기 훑어보고 재빨리 어디에 피가 나는지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피가 나는 곳은 없는 듯했다. (머리를 다쳤을 때 출혈이 없더라도 뇌진탕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출혈이 없어도 걱정이었다.) 애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일단 나부터 침착해져야 했다. 간신히 나는 진정을 찾고 호두에게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호두야, 어디 다친 데 없어? 어디에 '꽝' 부딪힌 거야? 괜찮으니까 엄마한테 얘기해 봐."
아이는 서랍장에 발을 올리고 놀다가 넘어졌다고 했다. 알고 보니 서랍장 철제 손잡이에 이마를 박는 바람에 그런 큰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 부위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하필 모서리가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서 이마가 찢어지진 않았을지 촉각이 곤두섰다. 상처를 꿰매어야 한다면 당장 어느 응급실로 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가뜩이나 요즘 의료 파업 여파로 응급의료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워낙 응급실 병상이 부족해서 119 구조대에 요청을 하더라도, 환자 측이 각자 알아서 수용 가능한 응급실을 찾아봐야 된다고. 이런 속 터지는 이야기들을 뉴스에서 익히 들어오던 상태였다.
각자도생
(제각기 살아날 방법을 꾀함)
의료 선진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의료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스스로 몸을 지켜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린다는 정부와 이를 반대하는 의료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의사들이 병원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파도, 응급 상황이 와도, 의료 서비스를 신속히(또는 전혀) 받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각자 알아서 건강을 잘 챙기고 있어야 해서 각.자.도.생.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는 병원 측 거부 때문에 부산에서 경기도 분당의 한 병원까지 왔다고 했고, 누구는 응급실 배정을 못 받아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했다. 고열로 축 늘어진 4살짜리 아이는 너무 늦게 응급실에 도착하는 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요즘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협상력 없는 자와 밥그릇을 지키고자 하는 자의 대결 -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역할은 국민들이 떠맡게 되었다.
이런 시국에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호두가 잔병치레가 많아서 각별히 더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사달이 났다. 다행히 아이 이마는 심하게 부어오르더니 시퍼런 멍이 생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니 이마빡이 터졌구나. 쯧쯧....... 계집자식 면상에 숭(흉터)이 지믄 안 될 긴데."
<토지 2> 중에서, 박경리 저.
한 바탕 난리를 치르고 졸였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육퇴 시간이 찾아왔다. 평소에 읽고 있던 <토지 2> 책을 펼쳤다. 마침 봉순이가 이마를 다친 에피소드가 나왔다. 나도 호두가 다치자마자 '여자애 얼굴에 수술 자국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요즘 세상에 남자, 여자 따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결과적으로 꿰매지 않아도 되는 상처여서 어찌나 천만다행이던지! 태명을 '호두'로 지었더니 머리가 호두 껍질처럼 단단했었나 보다. 태명 덕을 톡톡히 봤다. 그리고 이럴 때만 찾게 되는 하나님/부처님/알라신께 너무나 감사했고, 평소에 잘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했다.
제발 다치지 말고, 아프지 않으면서 호두가 컸으면 좋겠다. 바라는 건 이 두 가지뿐이 없다. 물론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 욕심엔 끝이 없지만, 애가 자주 아파보니 그저 건강한 게 최고더라. 암튼 이번 일은 내가 아이를 주의 깊게 보지 않은 탓도 있다. 이제 제법 혼자 잘 다니고 알아서 잘 노니까 방심했었는데 그러면 안 됐었다. 진짜 사고는 한순간이다.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니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뒤늦은 반성이지만 앞으로 정말 조심해야겠다.
마지막으로 각자도생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억울한 일이 없도록 각자의 몸, 각자의 가족을 잘 챙기자고 전하고 싶다. 안전이 제일이므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시길! 그리고 이 혼란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현장을 지켜주시는 의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참고로 나는 정치 성향이 없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특히 애 낳은 후로는 내 코가 석자여서 나랏일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그냥 애 낳고, 애 키우기 좋은 환경만 만들어주면 좋겠다. 저출산 대책 뽀에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