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에서 현장학습이 있었다. 참석이 가능한 학부모는 아이와 같이 갈 수 있었고, 남편이 은근히 가고 싶은 기색을 보이길래 내 대신 남편을 보냈다.
중간에 요리 시간이 있었는지 아빠는 호두가 음식 만드는 사진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진일 뿐. 호두가 '요리하는 과정을 거부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는 코멘트를 붙여왔다. 아빠 유전자에 있는 '똥고집'이 제대로 발동한 것이다.
집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이 흘렀을까? 남편은 아이를 다시 어린이집에 내려두고, 땀을 흘리며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곤 하는 말이,
"선생님이 뭘 하라고 하면 안 한다고 하고, 계속 반죽만 가지고 놀겠대. 혼자 요리 안 만들었어."
고집불통 호두가 눈에 선해서 웃음이 나왔지만, 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님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을 남편이 불쌍했다. 가뜩이나 땀도 많이 흘리는데 얼마나 당황해하며 땀을 줄줄 흘렸을지. 하지만 딸바보 아빠에게 이미 예견된 일이랄까?
평소에 남편은 가이드라인을 세워서 딸에게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냥 잘 놀아주는 아빠이자 뜻을 잘 받아주는 아빠일 뿐. 다정하다 못해 하트 뿅뿅 애정이 흘러넘친다. 눈치가 빠른 호두는 벌써부터 그런 아빠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다. 엄마는 싫은 소리를 해대지만 아빠는 예스맨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런 위계질서 속에서 아빠의 권위는... 지못미,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 (여기서 '권위'는 가부장적 권위가 아닌 어른으로서의 권위로서, 나는 틈틈이 아빠가 중심 없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해왔음을 명백히 밝힌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일주일 전, 저녁에 방을 치우는데 아이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호두에게 책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호두는 갑자기 아빠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책 치워야지."
어라, 요것 봐라? 본인이 어질러 놓고 아빠에게 떠넘기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나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벌써부터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에 경악하여 한 마디를 할 요량으로 꼬라지(상황)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더 기가 차는 건 아빠의 대답이었다.
"어, 알았어! 조금 있다가 치울게."
"???"
나는 정말 황당하고 이게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정신을 못 차리다가 부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나는 '욱' 하는 엄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런 악역으로 만들었는가?!!)
"호두, 네가 읽은 책이니까 네가 치워야지, 왜 아빠한테 정리하라고 해? 그리고 아빠는 지금 그게 맞는 대답이라고 한 거야?"
겨우 남편은 아이에게 "아빠가 도와줄게. 같이 치우자"며 멘트를 정정했고, 둘은 주섬주섬 책을 치웠다. 나는 가정 내 사라진 위계질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쇼킹하고 황당무계해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책 정리 사건'과 '요리 클래스 사건'을 종합하여 나는 진지하게 남편에게 훈육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이제 더 이상 방관하거나 오냐오냐 식의 태도는 안된다고 못을 박으면서 말이다. 남편은 알겠다고 했다. 머리로는 안 것 같지만 방법을 잘 모르는 듯했다. 하긴 나나 그 사람이나 초보 엄빠일 뿐인데... 올바른 훈육 방법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나마 유튜브로 여러 영상을 보며 내용을 공유했다. (글로 배운 연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튜브로 배운 양육'도 등장이다.)
참고로 요리 클래스 다음 날, 하원 길에 담임 선생님과 갑작스러운 면담을 하게 됐다. 선생님께서도 평소에 말을 잘 듣던 아이가 통제불능 상태가 된 데에 대하여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선생님께서는 집에 가셔서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보셨는데, 아무래도 1) 아버지의 양육 태도 2) 선생님을 향한 질투심이 주요한 원인이 됐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질투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현장학습 날 같은 반의 한 아이가 부모님 없이 혼자 참여하게 됐고 선생님이 그 아이와 한 조로 활동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호두가 계속 질투심을 보이고 째려(?) 보았다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아무래도 호두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선생님을 독차지하지 못해 토라졌었나 보다. (질투는 엄마를 닮은 것인가.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에서 강짜 부리던 여인이 갑자기 생각난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인물이다.)
담임 선생님은 아빠가 너무 고생하셨으니 위로를 해 드리라며 따뜻한 말씀으로 면담을 종료하셨다. 물론 안될 때는 "No"를 외칠 수 있는 훈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이시면서. 너무 와닿는 말씀이어서 바로 남편에게 내용을 공유하고, 우리는 훈육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이래서 '육아 동지'라고 하나 보다. 아직 전우애까지는 인정하기 싫으므로 일단 동지로 정의하겠다.)
모든 일이 그렇듯 내 맘대로 되는 건 없나 보다. 어제 발생한 따끈따끈한 사건으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어제저녁에도 장난감을 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호두에게 '정리 명령'이 떨어졌고, 호두는 즉시 아빠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이 녀석은 절대 혼자서는 안 치운다.) 그러고 나서 아빠와 둘이 장난감을 하나씩 정리하던 호두는 갑자기 손이 느려졌고... 치우는 것은 이미 아빠 몫이 된 상태. 미적거리다가 대뜸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와, 아빠 잘 치운다. 아빠 최고!"
할 말을 잃은 나다. 상황이 웃기고 애가 귀여워 웃음이 터지긴 했지만... 나와 남편이 육아 스킬을 계발하는 사이에 이 녀석도 진화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여우를 키우고 있나 보다. 요즘 세대 여아들의 발달이 빠른 탓도 있을까? 벌써 수 싸움에 돌입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아빠는 글렀으니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