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함과 날카로움, 그 사이 어딘가
어느 금요일 새벽 1시, 모두가 잠든 시간. 우리 집에서는 딸랑구 호두만 주무시는 중이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남편이 들어왔다. 야근이 아니라 퇴근 후 지인들을 만나고 온 것이다. 간도 크지.
역시나 거나하게 취했고 씻는 소리도 요란했다. 그 소리에 애가 깰까 봐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쌍심지를 켜고 남편이 씻고 나오길 기다렸다. 물론 잔소리도 장전해뒀다.
이내 잘 준비를 마치고 나온 남편은 잔뜩 날이 선 내게 대화를 시도했다.
“○○이는 요즘 유튜브 한대. 팔로워가 십만이 넘었다더라.”
만나고 온 친구들에 대한 짧은 근황 토크가 끝나자마자 남편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휴. 나는 남편의 드르렁 소리에 맞춰 들쑥날쑥하는 그의 배를 보며 혼잣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작 먹지.”
대식가인 남편의 술버릇은 술과 안주를 입에 마구 밀어 넣는 것. 술이 취할수록, 몸이 피곤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맛을 음미하지 않고 배를 빨리 채우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런 습관이 젊었을 적에는 통했을지 모르겠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는 괜찮을 리가 없었다.
잠이 든 지 한 서너 시간 정도 흘렀을까? 결국 남편은 탈이 나고야 말았는지 일어나서 소화제를 찾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도 방과 화장실을 수차례 드나들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덕분에 나도 잠을 설쳐서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안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걱정도 됐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남편은 평소처럼 일어나 아이와 놀아주었다. 밤에 그 난리를 겪고 피곤해서 늦잠을 잘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은 듯했다.
‘웬일이야? 괜찮나 보네? 역시 아침형 인간이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뒤, 아이는 내게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괜찮을까?”
나는 너무 깜짝 놀랐다. 호두는 한 번도 ‘괜찮다’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적절한 상황과 타이밍에 그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가 보는 눈이 이렇게 정확하다니?! 29개월 된 아이가 보기에 아빠가 안 좋아 보였나 보다. 아이 시선에는 예리함 혹은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한편으로는 호두가 아빠를 이렇게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뭉클하기도 했다. 평소에 엄빠의 컨디션 따위는 개의치 않아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우리 딸이 이렇게 효녀라는 사실이 나를 울컥하게 하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애가 별 뜻 없이 말했겠지. 아님 아빠가 놀아주는 게 영 시원치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이의 그 말 한마디가 너무 믿기지가 않아서 또 다른 가설도 세워봤다. 가장 유력한 것은, 호두 입장에서 봤을 때 아빠가 제대로 못 놀아줘서 못마땅한 마음에 그런 워딩이 나왔다는 썰이다.
하지만 그냥 예리한 눈을 가진 아이의 순수함으로 결론 내리기로 했다. 영원히 미담으로 포장해서 남겨두는 걸로!
이를 계기로 아이 앞에서 항상 솔직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벌써 이렇게 진실을 볼 줄 아는데... 혹여나 아이가 어리다고 부모로서 거짓으로 상황을 무마하는 등 아이를 진실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정말이지 내가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한창 말이 트여 새로운 단어와 문장으로 우리를 매일 놀라게 하는 호두. 가끔은 “아이 씨” 같은 적절치 못한 감탄사도 찰떡같이 따라 해서 엄마를 뜨악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애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는 말을 실감하며 올바르고 예쁜 말만 사용하려 노력 중이다. 행동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노력을 통해 우리 아이의 순수함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무채색의 순수함.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느끼지만 그만한 보물이 없는 것 같다. 커가면서 언젠가는 변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오래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자 소망. 이게 엄마 마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