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며 고지혈증 극복_하
지난 시간까지는 명상을 하며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두 권의 책(데이비드 호킨스의 "놓아버림"과 켄 윌버의 "무경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의학 또는 심리학에 뿌리를 둔 미국 사람들이지만 노자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상당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명상은 서양의 심리학적, 과학적 접근방법과 동양의 깨달음의 방식이 하나로 만나지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명상을 하며 도움을 받았던 TOP 5 책들 중 나머지 3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마이클 싱어는 숲속에 사는 소박한 명상가라고 책 표지에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큰 기업을 이끄는 CEO이기도 합니다.
제 느낌에는 불교의 마음공부를 좀 하신 분들이라면 들어보셨을 법한 유마힐(유마거사)을 떠오르게 하는 분입니다. 유마힐은 부처님 당대의 큰 부자였는데 출가하지 않은 재가수행자임에도 깊은 깨달음을 얻어서 문수보살과 같은 부처님의 출가제자들 중 가장 법력이 높다는 분들도 유마힐의 대승적 관점에 대해 오히려 배움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마이클 싱어도 대기업을 운영하지만 산속에서 늘 수행을 하며 無爲로 경영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유투브에서 이 분의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무척 유쾌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살짝 수다스러운(?) 캐릭터 였습니다. 물론, 전혀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그 분의 존재가 천진스럽고 가벼워 보였습니다. 제가 10권의 책에서 만난 모든 스승들 중에서도 가장 닮고 싶은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
이 책을 통해서 저는 삶이 몸부림과 고통으로 전락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이미 일어난 문제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사실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상황들, 환경들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통제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삶이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때 삶이 고통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하루 하루 이런 것들과 싸우면서 마찰을 일으킵니다.
마찰은 서로의 결이 다른 것이 만나 고집을 부리는 동안 나타나는 현상이고 마찰열은 물리학에서는 폐열이라고 부릅니다. 쓸 수가 없는 에너지라는 의미 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나는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은 생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이 알려주고 싶은 신호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에 가까이 다가갈 때 뜨겁다는 신호는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신호입니다. 이 때 고통이 없다면 화상을 입어 자기 몸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통각상실증이라는 병이 있는데 통증을 인식하는 경로에 문제가 생겨서 아픔을 못느끼는 병이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빨리 죽거나 몸이 망가지게 됩니다.
당뇨가 진행하면 감각이 둔해지게 되는데 발에 상처가 생겨도 잘 알아채지 못하고 상처의 회복도 느려서 결국 발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당뇨발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통증이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사례입니다. 정상적인 통증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유용한 신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통증이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라 가상의 위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내 눈앞에서 나를 위협하거나 모욕적인 말로 나를 무시한다면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잠자기 전에도 그 사람의 얼굴과 말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다면 가상의 위협이 나의 실제 삶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위협이 사라졌음에도 내가 그 사건과 상황, 그 대상을 저장해 두고 거기에 에너지를 뺏기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고통은 대체로 실제적인 위협보다는 이런 가상의 위협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위협이라고 판단한 정보를 자신이 저장해 두고 의식적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후회,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불안이라는 방식으로 고통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뇌가 과잉진화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쓸 데 없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쓸 데 없이 많이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자원(시간과 에너지, 돈)을 낭비하게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얼룩말은 사자가 나타나면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지만 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한가로이 다시 풀을 뜯고 장난을 치며 놉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를 위협하는 상대가 눈 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늘 그 존재를 의식하고 살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만듭니다.
명상은 과잉진화한 뇌를 리셋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물이나 사건에 꼬리표를 붙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경험합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어떤 것에도, 심지어는 잘 모르는 것들에게다가도 나름대로 꼬리표를 붙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 보다는 자신의 개념으로 코딩하여 하나의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야만 많은 정보를 뇌에다가 집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자기만의 개념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과 맞닥뜨릴 때 좌절하며 고통을 맛보고 세상을 원망하거나 투덜거리며 살기 쉽습니다.
명상은 굳어져 버린 뇌를 다시 유연하게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리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꼬리표를 붙이지 않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건 뭘까?"하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이것이 무엇일까 라는 호기심을 간직한 채 바라본다면 우리는 사물의 본질에 더욱 깊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고 하셨는지 모릅니다.
김기태 선생님은 저희 병원에 치료받으러 오시는 철학교수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을 통해 알게 된 분입니다. 제 환자인 철학교수님은 칸트를 전공하셨는데 하루는 치료하다가 제가 도덕경을 읽고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자신의 친구인 김기태 선생님의 도덕경도 참 읽을만 하다 하시면서 권해주셨습니다.
그 날 저녁 퇴근하면서 유투브로 김기태 선생님의 도덕경을 검색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굉장히 쉬우면서도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도덕경 강의를 한 참 듣다가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환자인 철학교수님께 부탁하여 세 사람이 함께 만나 식사를 했습니다. 김기태 선생님의 소박한 대구 사투리와 꾸미지 않는 그 천진함과 삶의 지혜를 나눠주려는 그 따뜻함이 함께 느껴져서 무척이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살면서 이런 분들을 만나는 것 만큼 큰 즐거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그 분의 집 근처에 가서 만났는데 선생님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쓰셨더군요. 그 중 한 권이 무분별의 지혜 라는 책인데 책이 두껍지는 않지만 그 임팩트는 상당히 두텁게 다가 왔습니다. 무분별의 지혜는 선종의 3대 선사인 승찬 스님의 신심명 이라는 책의 해설서이자 김기태선생님의 삶의 경험이 한 데 어우러진 것인데 글이 무척이나 간결하고 아름다워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아지는 책입니다.
노자의 마음이 도덕경이라는 짧은 책에 담겨 아름답게 전해 내려온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은 이 신심명 에서 가장 깔끔하게 전달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신심명의 첫구절에서 거의 게임이 끝난 것 같습니다.
-信心銘
어쩌면 상처받지 않는 영혼을 통해 알게 된 내용과 그대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가려서 택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분별심이라고 합니다. 둘로 나눈 다음에 그 중 한 쪽을 취하고 한 쪽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상처받지 않는 영혼의 영문판 원 제목은 Untethered Soul인데 우리말로 하자면 얽매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신심명에서는 이 얽매이는 것이 바로 가려서 택하려고 하는 분별심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부처님의 방법을 不二中道라고 합니다.
생사와 열반, 번뇌와 깨달음, 고통과 즐거움을 둘로 나눠서 열반, 깨달음, 즐거움은 취하고 생사, 번뇌,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은 이런 것들은 둘로 나눠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 둘이 매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생사즉열반, 번뇌즉보리, 색즉시공, 공즉시색...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둘로 나누는 분별심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별심은 부처님만 하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의 이야기도 사실은 분별심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선악과는 영어로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선과 악이라는 너무도 상반된 두 속성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나무는 하나이고 뿌리도 하나 입니다. 그러니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려는 것은 바로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생에서 객관적인 선과 객관적인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는 내가 선이고 나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악입니다. 비록 그 상대가 원수가 아니라 가족이라도 나를 비난하거나 내 뜻과 거스르는 것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의 비유는 선은 천사고 악은 악마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선은 좋은 것, 악은 나쁜 것 혹은 싫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문화에 따라 선과 악의 기준은 고무줄 늘어나듯 늘어나고 줄어 듭니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성지를 탈환하자는 서구사회의 좋은 명분이 실제로는 세계사에서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끝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서구 사회는 그 오랜 기간 성경을 바탕으로 성스럽고 고상한 문화를 만든 것 같지만 인간의 분별심으로 진리를 왜곡한 사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그들이 선악과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 즉 분별심을 버리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좀 더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이 분별심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有無相生 은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도와서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有와 無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아래 도덕경에서 좀 더 자세히...)
주역의 이야기도 이 분별심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생(生)한다' 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진리는 양의(陰과 陽)를 가져오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象)은 陽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움직이는 陰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역의 이 이야기는 양자역학의 근본원리와 상통합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입자성은 우리 인간의 감각기관의 한계에 따른 겉보기 현상입니다. 마치 象이 陽처럼 보이는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자성 뒤에 감춰진 원리, 즉 파동성 내지는 에너지의 원리는 그 입자성을 유지하게 하는 진정한 힘이며 이것이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쉽게 감지할 수 없기에 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陰陽이 늘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만 아니라 무의미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입자성의 陽의 세계 보다도 늘 陰을 먼저 말하는 이유도 에너지와 파동의 흐름을 더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심명을 통해 승찬스님이 하는 말씀은 고통을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 쓸모가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 보라는 것이고 즐거움도 계속 잡으려고 집착하면 그것이 곧 고통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은 수시로 찾아 오기에 고통스럽습니다.
계속 붙잡고 싶은 것은 때때로 떠나 가기에 고통스럽습니다.
인연따라 오고 인연이 다 하면 가는 줄 알면 집착과 망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특별한 해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오면 그대로 맞이하여 들이고 즐거움이 떠나가면 선선히 보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해탈을 지극한 도라고 하든, 천국이라고 하든, 극락이라고 하든, 흔들림 없는 행복이라고 하든, 마음의 평화라고 하든 그것은 각자의 문화와 배경에 따라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관계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나 언어에 붙들리지 않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서로 호기심을 유지한다면 우리 모두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덕경 제 1장 첫구절은 너무도 유명해서 노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알 것 같습니다.
궁극적 진리인 도를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도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개념을 부여한다는 뜻인데 개념을 부여하고 나면 더이상 호기심이 생기지 않아서 그것을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입니다. 개념을 부여한다는 것은 꼬리표를 붙여서 기호화 한다는 것인데 실제(實)와 다르게 이름(名)만 남는다는 것이죠.
도덕경 제 1장의 그 다음 구절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원문은 아래의 이미지를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道德經
有와 無가 사실은 하나이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현묘한 것이라는 노자의 말은 입자와 파동이 중첩되어 있다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고전역학이 有에 집착하여 사물을 고정된 실체로 파악하는 입자적 관점이라면 양자역학은 無의 세계를 알아차리고 고정된 실체라고 할 것이 없으며 다만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입자성과 그 근본은 에너지 내지는 파동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역의 내용도 음양과 태극의 원리가 균형과 조화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체적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원리가 되는 이면의 에너지에 늘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그 당시 측정할 만한 장치가 없었기에 실증적으로 에너지의 존재에 대해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無의 세계에 대해 동양사상에서는 언제나 의식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에서 발달한 과학적 지식과 실증적 사상체계는 有의 세계를 뚜렷하게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노자와 장자, 주역, 석가모니의 가르침 등은 無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 조차도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을 노자는 현묘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파인만의 설명보다 노자가 말한 현묘하다는 표현이 더 좋습니다.
인간이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이해하는 만큼 활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無의 세계에 대해 인식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 우리 삶을 움직이는 에너지에 대해 의식한다면 아마 有의 세계도 더 확장되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입자성에 묶여서 고전물리학만 아는 사람은 스마트폰이나 양자컴퓨터가 펼쳐 나가는 세계를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각으로 진리를 대체하는 사람은 고전역학적 세계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감각 너머의 에너지의 세계, 파동의 세계와 연결된 사람은 빛의 파동성을 이해하고 양자역학적 원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더 큰 문제를 해결하고 더 많은 가능성의 세계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플라톤이 비유로 말한 동굴밖의 세상, 즉 실체적 진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림자의 세계인 동굴 안에만 머물러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와서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데 이런 사람을 철인(철학하는 사람, 지혜를 경험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이라 합니다. 철학은 한 마디로 하자면 인간의 문화와 사상 가운데 가장 추상적인 것을 말합니다. 플라톤은 철인이 정치를 해야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이런 사상을 철인정치라고 합니다.
구글이나 애플, 페이스북과 같은 보이는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앞다투어 명상을 사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국내에서도 앞서 나가는 기업들은 틀림없이 이런 흐름을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명상만이 철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철학자들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사색하고 명상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철학은 고리타분하게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구체적으로 나타난 현실세계의 이면에 있는 생각과 그 생각의 바탕이 되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그 범위를 넓히면서 추상과 에너지로써의 역할을 합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돈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돈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물고기나 곡식처럼 구체적이었다가 조개껍질, 동전, 화폐로 발전하고 지금은 단지 디지털 코드가 돈의 역할을 합니다. 점점 돈의 모습도 구체물에서 추상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돈의 추상화 과정을 이해하고 추상적인 생각을 구체물로 연결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동전이나 화폐를 돈의 전부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본주의는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세계는 누군가의 머릿속에 생각이나 아이디어 수준에 있었던 것이 과학적 기술을 만나 우리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과학적 지식이 도구라면 철학은 의도입니다. 의도가 없다면 도구는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자동차라면 철학은 운전자입니다. 제대로 된 철학이 없는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엔진의 출력이 높을 수록 위험한 흉기로 변합니다.
앞서가는 기업들은 명상과 철학, 생각하는 법을 더욱 깊이 다듬어 보이는 현실세계를 장악하려고 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철인경영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철학이 기업의 번영과 인류의 번영을 함께 고려할지, 아니면 기업의 번영 만을 우선적으로 반영할 것인지 모두가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가들이 정당의 번영과 권력장악만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 모든 시민이 철인이 되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집단적 철인정치의 구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일방적인 교육방식으로는 깊은 사유를 통해 철학적 사고능력을 갖추는 시민을 길러 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능력보다 자발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훨씬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에게도 명상을 통해 자신의 감정, 생각, 욕구를 살펴보는 교육이 꼭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명상에 관한 이야기는 글을 쓰면 멈추지를 못하고 계속 길게 이어지게 되네요.
저는 명상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 좀 더 쉬워졌습니다.
하늘을 더 자주 보고 꽃을 좀 더 자주 사서 꽂아 두게 됩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좀 더 자주 느끼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문득문득 깨닫게 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여러 환경들이 사실은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신호를 좀 더 예민하게 알아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지나쳐 가던 많은 것들을 더 깊이 느끼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초보 수준이기는 합니다만 이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좀 더 좋습니다.
너무 글이 길어져서 명상에 관한 이야기는 이 다섯권의 책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약 안먹고 고지혈증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총정리하여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