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며 고지혈증 극복_중_무경계
지난 시간에 명상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책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놓아버림"에 대해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두 번째 큰 도움을 준 책 켄 윌버의 "무경계 No Boundary"에 대해 함께 나눠 보겠습니다.
켄 윌버는 스스로 영적 지도자라든지 구루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자신의 연구를 책으로 대중에게 전하는 작가로 불리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동서양의 사상적 흐름을 융합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불리는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파헤쳐 최대한 본질에 다가서려는 스승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책을 20대 초반에 썼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쓴 책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좀 더 대중적으로 쓴 책이 바로 이 무경계라는 책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입니다.
과연 나의 경계는 어디인가?
아주 익숙한 나의 경계는 내 피부입니다.
내 피부의 안쪽은 나이고 바깥쪽은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몸속에는 나의 세포수에 두 배쯤 되는 100조 개의 미생물 세포들이 있습니다. 금방 먹은 음식물도 있고 곧 배출되기를 기다리는 배설물들도 있죠. 이런 것들은 나라고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니 내 피부가 내 경계라는 생각은 생물학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라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내 피부 바깥은 내가 아닌가?
딸아이가 열이 나고 배가 아파서 힘들어하면 나도 마음이 아프고 몸에서 뭔가 불편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아내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나도 속이 쓰리고 무언가 무겁게 내 몸을 가라앉게 하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아들이 환한 얼굴로 밝게 인사를 하면 내 마음도 밝아집니다.
우리 집 강아지 찹쌀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출근하는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나의 일부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을 나의 몸 전체와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어느 한 부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내 피부 경계 안의 어떤 세포들보다 더욱 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물건들도 때로는 나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끼던 물건이 없어지면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아프고 허전합니다.
저는 늘 환자분들과 함께 사니까 아파서 저를 필요로 하는 환자분들도 나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환자분들을 치료할 때 늘 쓰는 주사기나 초음파 기계도 나와 환자분들을 연결하는 나의 일부 같습니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장대나 카레이서가 자신의 자동차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뇌를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장치(fMRI)로 촬영해 보면 손에 해당하는 부위가 굉장히 길게 뻗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대가 마치 손에서 연결되어 자신의 손이 길게 늘어난 것처럼 뇌가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카레이서의 뇌를 촬영해 보면 어깨에 해당하는 부위가 굉장히 넓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코너링을 할 때 자동차의 사이드미러를 마치 자신의 어깨처럼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뇌는 자신의 피부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뇌 안에 그렇게 연결된 대상에 해당하는 영역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장대나 카레이서의 자동차 사이드 미러처럼 우리 뇌 속에는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내가 아닐까요?
내가 쓰는 물 잔이나 컴퓨터, 화분이나 심지어는 가로수도 비록 확률적인 밀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완전히 내가 아니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공기와 물조차 나의 일부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내 속으로 들어가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내뱉은 후 내 바깥에 있는 저 공기가 완전히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내리는 저 빗방울은 언젠가 내 몸속에 있었던 분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 중에서 100%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우리 이웃이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궁극적으로는 이 행성 위에 있는 모든 자연과 사람들은 비록 내 피부 안쪽에 있는 세포들보다 밀도는 낮지만 전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확장하면 태양도, 태양계 너머에 있는 은하들과 암흑물질 조차도 다 알지는 못하기에 비록 확률분포의 밀도는 낮겠지만 완전히 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나의 경계는 내 피부를 기준으로 확률적 밀도가 낮아지기는 하지만 더 멀리 뻗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뇌 속에는 가족과 이웃, 환자들과 직원들 뿐 아니라 늘 밟으며 지나다니는 수성못의 흙과 낙엽들, 앞산의 알싸한 공기와 시냇물 까지도 일정 부분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와 남의 경계는?
내 피부의 안쪽만 나라고 생각하고(自)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은 남이라고 생각한다면(他) 내가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좁고 옹색할까요?
내 두개골 안의 그 조그만 뇌 속에 온통 나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정말 나는 행복할까요?
내 피부의 안쪽만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에만 집착한다면 내 피부 너머에 있는 수많은 자연의 에너지와 사람들의 의식적 에너지가 나의 행복을 빌어줄까요?
켄 윌버의 무경계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느꼈습니다.
나의 경계가 내 피부 너머로 뻗어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넓어지고 해방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환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 자신이 환자들 안으로 녹아들어 가고 자연과 함께 있을 때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함께 연결되어 자연의 호흡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은 뭔가 모르게 불편합니다.
담벼락에 철조망을 쳐 놓기도 하고 남북이 휴전선을 쳐 놓고 서로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은 서로를 경계하면서 나와 남을 나누고, 우리와 그들로 나눠서 서로 배척하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초등학교 때 짝꿍과 사이가 틀어진 어느 날, 낡은 나무 책상의 중간에다가 선을 그어 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했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 선은 서로를 분리하고 배척하기 위한 선이었습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은 이런 방식으로 쓰이는 일이 흔합니다.
이 책에는 자연 속에서도 경계선을 찾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과는 다르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는 수평선.
땅과 바다를 구분하는 해안선.
이런 선들은 서로 다른 두 성질을 구분하는 선이지만 한 편으로는 서로 다른 두 성질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경계에서는 가장 활발한 만남이 일어나고 모든 생명이 풍성하게 살아나는 생명의 보물창고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개펄에서는 온갖 동물과 미생물들이 활발하게 살아가고 가장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만든 경계에서는 모두 서로 생명을 억압하고 분리하는데 자연의 경계에서는 모든 생명이 풍성하게 살아납니다.
여기서 양자역학과 켄 윌버가 말하는 무경계가 하나로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에 대한 관점이 나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입자로 볼 것인가? 파동으로 볼 것인가?
빛을 입자로 보는 과학자들과 빛을 파동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수 백 년간 엎치락뒤치락 싸웠습니다.
새로운 실험과 관찰 결과가 나올 때마다 빛은 입자다, 아니다, 파동이다... 이런 식의 논쟁은 끝없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논쟁이 끝이 납니다.
어느 한쪽이 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전역학을 배운 사람들의 개념에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죠.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이 무슨 해괴한 말입니까? 도저히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이 하나에 중첩되어 있다니...
입자는 질량을 가져야 하는데 광자는 질량이 없습니다. 그리고 파동이란 에너지의 흐름일 뿐이고 실체가 없는데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니...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과학자들이 빛은 이 두 가지 성질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 되었죠.
더 나아가 전자와 같은 미립자나 좀 더 큰 원소들, 심지어는 분자량이 꽤 큰 분자들도 실제 실험을 통해 입자와 파동의 이원성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질량을 가진 것들이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입자처럼 보이는 것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질량을 가지는 부분은 매우 작아서 속이 텅 빈 것처럼 보이고 그 질량을 가지는 부분조차도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확정할 수 없고 다만 확률분포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 모두가 입자처럼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에너지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입자의 개념에서 보자면 다른 입자들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로써의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독립된 유기체의 특징은 개체 보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입니다.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먹고,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면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죠. 이것이 개체 보존의 법칙을 따르는 나입니다.
그러나 에너지의 개념에서 보는 나는 다른 파동과 공명을 일으키거나 간섭을 합니다.
어떤 에너지를 만나면 파동이 훨씬 커지고 어떤 에너지를 만나면 파동이 사그러 듭니다.
마치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저절로 얼굴이 환해지는데 어떤 사람은 생각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나를 정의할 때 입자라고 해야 할까요? 파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빛이 입자 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것처럼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모두 옳을 것입니다.
마치 헨리 포드가 한 말처럼 말이죠.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말하든지, 할 수 없다고 말하든지 당신은 항상 옳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독립된 알갱이처럼 생각한다면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보존하고 안전하기를 원하니까요.
나 자신을 에너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어느 한쪽만 택하고 그것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마치 빛의 한 가지 성질만 이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자신의 신체적 위협을 방어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서는 입자처럼 행동하는 쪽이 유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자기 한 몸을 지키고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산다면 그것 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최신형 스마트 폰으로 통화나 문자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느 정도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는 나의 경계를 확장하여 바깥세상과 연결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저는 저를 더 확장하여 더 좋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난 뒤 더 풍성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너무 오랫동안 두고두고 참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 따스한 난방과 시원한 냉방이 되는 집, 몸을 보호하면서도 그다지 밉상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옷들이 있다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안전은 보장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은 입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꽤 많은 시간 동안 제 자신을 파동처럼 생각하고 에너지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면 더욱 좋은 파동이 일어나니까요.
그 파동은 나에게도 좋지만 남에게도 좋은 것이죠. 이런 파동의 흐름에서는 나와 남의 경계가 때때로 희미해지곤 합니다.
나도 그들을 남이라는 생각을 잘하지 않고 그들도 나를 남으로 여기질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관점이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펼쳐집니다.
빛이 관찰자가 있을 때 입자처럼 행동하고 관찰자가 없으면 파동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나를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나에 대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관측하면 나는 입자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이때의 특정한 의도는 대부분 집착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더라도 집착하면 애착이 되고 애착은 그 대상을 불행하게 만들 뿐 아니라 애착을 가진 자신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노자가 이런 말을 했나 봅니다.
집착은 作爲라고 할 수 있고 作爲는 처음에는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래서 무릇 무언가를 정말로 잘 해내는 사람은 無爲(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움)로써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성과를 낸 뒤에 공을 아랫사람에게로 돌리고 뒤로 물러서는 리더처럼 無爲의 힘이 바로 자신을 파동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많은 일들을 해도 마찰이 별로 일어나질 않죠. 어설프게 똑똑한 사람들이 개혁을 한다면서 떠들썩한데 뒤로 가보면 구성원들의 기분만 상하게 하고 정작 일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죠.
이렇게 無爲의 힘으로 성취를 이루는 경우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과 같습니다.
한글도 못 읽는 부모님에게 아이들을 서울대학교에 보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글씨를 하나도 모르니까 학교 다녀온 아이에게 매일 글을 좀 알려달라고 부탁을 해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가르치면서 컸는데 그게 전부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자신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배우면서 아이들이 자긍심과 부모님을 돕는 마음,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더 깊게 생각하는 법 등을 익히면서 진짜 공부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많이 배운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온갖 것들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아이는 심드렁하거나 오히려 공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무기력과 우울에 빠지는 경우를 作爲라고 한다면 한글도 못 읽는 부모님은 無爲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사라진 無我의 경지가 되겠죠. 이때의 無我는 집착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을 입자로 정의하는 사람은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 어느 곳에 닿을지 이미 결정이 됩니다.
한 마디로 하면 살아가는 방식이 빤하다는 것입니다.
고전역학에서 시작점에서 물체의 힘의 크기와 방향을 알면 그 목적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파동으로 정의하는 사람은 작은 구멍을 통과하더라도 그 끝이 어디에 가서 닿을지, 얼마나 확산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주변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더욱 확대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기 때문에 끝이 얼마나 창대할지 짐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좋은 에너지를 주변으로 끝없이 확산시키는 사람은 결국 자신과 비슷한 좋은 에너지를 가지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냉혹한 가르침이 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25장 29절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은 결국 자신의 에너지와 공명하는 비슷한 에너지 수준을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풍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보다는 오히려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 주변에도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서 좋은 일들을 성사시켜 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봐야 자기에게 뭔가 득이 되는 것도 없는데 그냥 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듭니다.
온라인 플랫폼 시대에 좋은 포털사이트나 플랫폼 사업자들이 엄청난 기업가치를 자랑하는 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오프라인 휴먼 플랫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이런 사람에게는 좋은 정보나 좋은 기회들이 물밀 듯 몰려듭니다. 개인의 가치도 무한정으로 올라가게 되죠.
제가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비법을 알려줄 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배우자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최고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트를 할 때 몇 가지 꼭 확인해 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늙고 싶은지,
어떤 사람을 닮고 싶은지,
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당황하거나 원치 않는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등을 꼭 확인해 보라고 합니다.
자기가 성숙한 인격을 가져야 성숙한 태도를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내가 아직 미성숙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 와도 내가 알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책을 읽은 일이 까마득하다면 함께 책을 고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죽음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삶도 건강하게 살 가능성이 큽니다.
당황하거나 원치 않는 상황에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의 품격입니다. 품격이 없는 사람과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그토록 다들 나! 나! 나! 를 부르짖지만 과연 나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정말로 내 것이기는 한가?
혹시 다른 사람들이 다 좋다니까 한 번 보러 가는 영화와 같지는 않은가? 내가 추구하고 나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내 속에 그냥 자리 잡은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 떠 올랐습니다.
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원숭이를 포함하여 유인원들의 뇌 속에는 거울 뉴런이라는 것이 있어서 상대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동 프로그램이 깔려 있습니다. 사피엔스는 그것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갓 태어난 아기라도 엄마가 자기를 보며 미소를 지으면 방긋 웃음을 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누군가가 하품을 하는 것을 보면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품을 하게 됩니다.
나도 환자분들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어 보이면 환자분들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갑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거울 뉴런이 하는 일들입니다.
거울 뉴런이 없다면 인간의 사회화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무리 언어가 발달해도 인간은 직감적으로 상대의 얼굴 표정을 보고 즉각 어떤 느낌을 갖고 경계를 해야 할지 친근하게 대해야 할지 어느 정도 결정짓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웃음을 보고 웃는 법을 배웠을 테고 어릴 때 주변 누군가의 말투를 따라 하다가 지금의 말투가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나 혼자 생각해낸 고유의 생각 방식이나 감정 표현 방식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대체로 누군가의 생각이나 표현 방식이 내 눈에 좋아 보여서 따라 하다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니 내 속에는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無我라는 말이 공연한 말이 아닙니다.
다양한 생각과 표현, 감정의 패턴 등과 같은 조합이 나의 독특함을 만들어 내었겠지만 따지고 들어가 보면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을 차용해 온 것입니다. 물론 내게 생각과 행동을 옮겨 준 그 사람도 누군가의 그것들을 차용해 왔겠죠. 그러면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감정 습관이 적절히 버무려진 조합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여기에서 내 감정의 패턴과 생각의 패턴을 멈추고 다시 돌아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과 생각이 과연 나의 것이며 내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인가?
습관처럼 그냥 되풀이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서 이런 감정은 과연 나의 것인가?
아니면 불안한 마음으로 늘 자신을 보호하려고 경계를 만드는 에고의 자기 보호 본능에 따른 것인가?
부정적인 감정의 상당수는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상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다만 그 감정에 휘둘려 따라가지 않을 뿐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 구름처럼 흘러가는 그 감정을 지그시 쳐다보며 감상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명상은 아무런 부작용 없이 자율신경을 안정시켜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심혈관질환 위험성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명상을 하고 난 뒤부터는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더욱 자주 마주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삶에 감사하고 순간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이상은 약 안 먹고 고지혈증을 극복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응원하는 닥터 행복한 이었습니다.
명상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데 다음 시간에는 좀 더 간단하게 글을 마무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