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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윈 Mar 07. 2024

4년 만의 한국방문기 - 5.5

크리스마스, 허름한 구유에서 벗어나 화려한 치장을 한 기념일에 대하여


 집에 도착하고 나서 좀 쉬기로 했습니다. 새벽부터 설쳐대서 다들 피곤해하더라고요. 부모님과 동생은 피곤하다며 낮잠을 자고 전 아직 시차적응이 덜 돼서 그런가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서 요새 제일 핫하다는 '고려거란전쟁'을 보면서 시간을 때웠습니다. 처음엔 시간 때울 생각으로 봤는데 강조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동 걸리는 순간부터 홀린 듯이 봤습니다.


 강조는 충신인가 역신인가, 그 사이에서 적당하게 줄 타는 솜씨가 아주 끝내주더라고요. '악연의 두 사람이지만 공동의 적을 위해서는 손을 잡고 아군이 될 수 있다'는 버디물 느낌도 좋았고, 비록 역신이 되었지만 국가를 향한 충정만큼은 누구보다 크다는 강조의 복합적인 캐릭터를 굉장히 잘 살렸더라고요.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와, 한국에서도 이렇게 사극을 잘 만들 수가 있구나.'하고 감탄했던 게 영화 '남한산성'이 끝이었는데 이 드라마도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한참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부모님이 일어나셨더라고요. 크리스마슨데 남포동 나가서 밥도 먹고 크리스마스트리도 보자고 하셨습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라. 좀 기대가 되긴 했습니다. 원래 그런 걸 보러 가는 걸 좋아하진 않는데 그 분위기가 좀 궁금하더라고요.




 밴쿠버로 넘어온 지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동안 크리스마스를 한국에서 보낸 적은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비행기 티켓이 너무 비싸거든요.


 제일 쌀 때가 25일 아니면 26일 출발인데 시차 때문에 한국에 도착하면 하루가 추가로 붙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비행기 안에서 보내거나 밴쿠버에서 한국 갈 짐을 싸고 있던가, 그랬었거든요.


 저녁은 남포동과 가까운 자갈치 시장에 가서 생선구이를 먹기로 했습니다. 제가 구운 생선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거기다가 제가 자주 갔던 자갈치 시장의 생선구이 집은 생선구이를 시키면 선짓국을 무한으로 리필해 줍니다.


 ‘예전엔 전어젓갈도 내줬었는데 요새도 주시려나, 옛날엔 서대구이가 참 맛있었는데 요새도 서대를 주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드디어 내가 다시 이거 먹으러 가는구나.


 당연히 운전을 해서 갈 줄 알았는데 버스 타고 지하철 역 갔다가 지하철 타고 자갈치로 넘어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왜 굳이 차 두고 지하철을 타고나냐, 차라리 지하철 4명이서 탈 돈이면 택시를 타는 게 낫지 않냐."라고 여쭤보니


 "크리스마스에 남포동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차타고는 못 간다."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속으로는 '아니 사람이 많아봐야 얼마나 많다고 귀찮게 지하철을 타고 간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오랜만에 지하철 타는 것도 좋지. 하는 생각도 들어서 군말 없이 집을 나섰습니다.


 지하철도 만원이긴 한데 자갈치 역에 도착해서 도로 위로 올라오자마자 인파와 도로의 차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도 사람인데, 도로에 차가 거의 움직이질 못하더라고요.


 끊임없이 울리는 클락슨 소리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차들. 신호등이 있는데도 경찰이 나와서 통제를 하는 곳은 그나마 괜찮은데 경찰이 없는 곳은 통제가 안되고 있었습니다.


 "와 전쟁 나서 피난 가고 있는 줄 알았네. 아무리 차가 밀려서 짜증 난다 해도 클락슨 이렇게 쓰고 신호 끝나는데 꼬리 물고 저렇게 가도 되냐?"

 "캐나다는 이렇게 안 하나 보네. 부산에선 저렇게 꼬리 물고 안 들어가면 집에 못 가고 뒤차가 엄청 뭐라고 해. 클락슨 빵빵 치면서 앞차에 바짝 붙으면서 앞으로 더 가라고 압박해야 돼."


라는 동생의 대답에 벙 쪘습니다. 진짜야? 부산 운전이 험하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물론 평소땐 교통체증이 이 정도까진 아니라지만 충격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뭐라고 이 고생을 하고 이렇게 오시나...



   


 생선구이집은 4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아직도 선짓국 무한 리필에 생선구이 모둠을 시키니 '서대'도 들어있더라고요. 달라진 건 예전엔 전어젓갈을 줬는데 이번엔 멸치젓갈을 준다는 것.


 나머지는 옛날 그대로더라고요. 생선구이를 푸짐하게 시켜놓고 소주 한 잔을 걸치니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갈치 빼고 모든 생선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다고 감탄하며 생선구이를 먹는 제가 신기해 보였는지 어머니께서


 "아니 거기도 바닷가 옆이라면서? 거긴 이런 거 안 파니?"

 "이렇게 한국식으로 푸짐하게 주는 데는 없어요. 한식당 가서 고등어구이만 사 먹어도 한 2만 원 돈 하는데 못 사 먹지요. 집에서 먹으려고 해도 생선 구우면 냄새가 너무 나니까 잘 안 먹죠."


 하면서 생선 뼈까지 깔끔하게 잘 발라 먹었습니다.


  제가 부산사람이고 자갈치시장 근처에 살아서 그런진 몰라도 밴쿠버는 똑같은 항구 도신대 생각보다 해산물 종류가 풍부하진 않은 느낌입니다.


 대형 마트에 가면 이것저것 팔긴 하지만 해산물만 파는 가게에 가면 생선은 연어, 송어, 대구, 할리벗, 참치 정도가 대부분이죠.


 한국처럼 전어니 꽁치니, 고등어니 이런 건 생물로 좀 보기 힘들더라고요. 가을엔 전어, 여름엔 민어 이런 식의 제철 생선도 별로 없고요.


 식문화가 다르고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다 보니 한국식 생선구이를 좋아하는 제겐 썩 당기지 않는 것들입니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죠.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자갈치 시장을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파는 생선들이 종류도 그렇고 양도 그렇고 많이 줄었더라고요.


 예전엔 상어나 개복치 같은 신기한 생선들도 보이고 했었는데, 별로 없는 걸 보니 때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갈치 시장 자체가 예전에 비해 약해진 건지. 아직도 회센터 쪽은 북적북적한데 밖에서 생선을 파는 좌판대는 인적이 드문드문했었습니다.


 회센터 안에는 겨울방어가 참 많았습니다. 다음엔 방어회에 소주 한 잔 하자고 아버지와 약속을 하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광복로로 향했습니다.


 세상에, 광복로에 인파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네요. 평소땐 남포동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크리스마스트리 때문인지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경찰들이 통제를 하면서 "멈추지 말고 계속 걸으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작년이었나 재작년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의 흉터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복로는 참사가 있었던 공간보단 훨씬 넓고 빠져나갈 골목도 많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니 저런 인파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하튼 사람들에 휩쓸려 걸어가다 보니 트리가 보였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아주 크고 예뻤습니다. 가족들끼리 사진도 찍고, 구경을 오래는 못했지만 '복잡하긴 해도 한 번 와서 볼만하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인파를 따라 계속 따라가니 크리스마스 조형물들이 꾸며져 있고, 롯데백화점 쪽에는 궁전처럼 만들어 놓은 사인까지. 구경하면서도 '한국은 명절이나 행사가 있으면 이런 것들이 많아서 좋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밴쿠버는 한국처럼 명절 때 이런 식으로 잘 꾸며놓지 않고 갈만한 곳도 별로 없거든요. 잘 꾸며놓은 곳은 가려면 사람도 많고 입장료도 비싸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그렇게 예쁘게 꾸며놓은 조형물들을 찍다가 문득 예수님, 그분의 생각이 났습니다.




 크리스마스, 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부활절 다음으로 아주 중요한 명절이지요.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정확한 그분의 탄생일을 알 수 없으니 "이날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자."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기념일이지요.


 아마 서양 쪽 나라들이 대부분 그럴 것 같긴 한데, 캐나다의 크리스마스는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왜냐면 그때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다 닫거든요. 그래서 장을 보거나 술을 사려면 23,24일에 미리 준비를 해놔야 합니다.


 요샌 문을 여는 가게들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아주 조용한 분위기입니다. 한국하고 다르게 크리스마스 당일날은 개신교회나 성당을 가고, 가족들끼리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인식이 강하더라고요.


 물론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는 다시 시끌벅적 해집니다. 26일은 'Boxing day'라고 물건들을 특가 세일하는 날이어서 그날부터 시작해서 연말까진 시끌벅적하지요.


 제가 한국에 살았을 땐 종교가 없었으니 한국의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가 생기고 나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런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와 한국의 크리스마스가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성탄미사 때 신부님이 강론 중에 읽어주셨던 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Lambert Noben의 '내가 태어난 이유는'이었던 거 같습니다.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내가 벌거벗은 채 태어난 이유는

 네가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고

 내가 가난하게 태어난 이유는

 네가 나를 유일한 부로 여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구유에 태어난 이유는

 네가 모든 환경이 거룩하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고


....


 내가 내 생명 안에 태어난 이유는

 너희 모두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로 마무리 되는 시였습니다. 성탄미사 강론으로는 너무 좋았던 시였죠. 그 시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전까진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큰 생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도요. 하지만 저 시를 듣고 나서 그분 탄생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큰 영향을 준 종교계의 인물이라면 아무래도 예수와 싯다르타를 꼽을 수 있겠지요. 둘의 가르침은 비슷하면서 조금 다릅니다만 두 분의 출생은 180도 다르지요.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별다른 탈 없이 왕이 될 운명이었죠. 하지만 궁궐 밖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보고는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아 고행길로 나서지요.


 그리고 수많은 고행을 겪고 나서 싯다르타는 삶의 허무를 깨닫고 허무한 삶을 참되게 살아갈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허무한 세상을 살아갈 참된 방법을 제자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지요.


 예수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심지어 집 안도 아닌 말이 사는 마구간에서 세상을 마주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고행으로 얻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부로서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고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태어났고, 그 가르침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고 그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를 지상으로 보낸 것이라면, 굳이 그런 환경에 예수를 태어나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올바르게 자란다음, 훌륭한 왕이 되고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더 쉽고 편한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러지 않았고 예수는 고난을 겪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에 대해서 명쾌하게 풀어낸 시가 바로 저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제게 크리스마스는 축제 분위기보다는 조용하게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과 보내는 소박한 날이라는 생각이 좀 더 커졌습니다.


 밴쿠버에선 크리스마스엔 친한 친구들끼리 저녁을 같이 먹거나, 조용한 동네에 놀러 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던가 그런 식으로 보내왔거든요. 그래서 제겐 밝은 분위기의 성탄미사보단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의 성탄전야 미사가 더 와닿습니다.


 늦게 미사를 보고 와야 하니 피곤하긴 하지만 그분의 탄생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이 만들어지니까요.


 크리스마스를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니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삼위일체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예수가 왜 구유에서 태어났는지, 왜 그런 삶을 살고 그렇게 죽었는지. 왜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에 대해서,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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