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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추행 1차

by 이영

가해자가 30년 이상 경영한 그의 회사에서 처음 성추행을 당했다. 유일한 실무자였던 나는 외부 손님도 참석하는 회원사 방문 행사를 잘 마치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주요 일정인 공장 견학을 무사히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사람은 먼저 다음 장소로 출발해 당시 그곳엔 나를 포함해 3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밖에서 배웅을 하던 가해자가 입구에 나타났다. 마침 식사를 끝내고 막 일어서려던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쳐 큰 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건넸다.


가해자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다가왔다. 약 50명 정도 앉을 수 있던 작은 식당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식판이 부딪히는 설거지 소리로 시끄러워 귀가 먹먹했다. 소리를 잘 듣기 위해 내 왼쪽 어깨가 그의 정면을 향하도록 서서 귀를 가까이 댔다. 그 순간 “수고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내 등에서 브래지어를 따라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어 팔뚝 살을 움켜쥐었다. 가슴에 닿을락 말락 하는 그의 손끝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으며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식판을 반납하던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슬그머니 손을 풀고 천연덕스럽게 그들과 얘기하는 가해자를 보면서 분노가 올라왔다. 나는 방금 성추행을 당했다.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여긴 가해자의 회사였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또, 지금은 가장 큰 행사 중이고 나는 유일한 실무자로 행여 분위기가 싸해져 남은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 "얼른 가자"는 재촉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다고 그 일이 진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어릴 적 남자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여자 팔뚝 살을 만지는 느낌은 가슴을 만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걸 모르는 남자는 세상에 한 명도 없다" 했다. 가해자는 나보다 30살은 더 많은 70대의 노인이었고 업계에서 권위 있는, 평소 나도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나를 성추행하다니 믿기지 않아 인지부조화가 왔다. 말 그대로 수고했다고 격려하려던 건데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였나? 몇 번을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신체 부위를 굳이 움켜잡은 건 격려가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무엇보다 그 순간 내 몸이 느낀 수치, 불쾌, 분노가 그 증거였다. 전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같은 일을 당했으면 바로 조치를 취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곳은 그의 회사였고, 나는 그의 말 한 마디에 해고될 수도 있는 5인 미만 사업장 직원이었다. 취업 스트레스로 공황발작까지 겪으며 입사했기 때문에 다시 구직을 해야 하는 게 겁이 났다. 또 이 무렵엔 피부병과 1년 반 넘게 준비한 시험을 50일 앞두고 극에 달한 스트레스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라 일상에 변화가 생기는 게 부담스러웠다.


처음엔 화가 나서 공부도 안 됐지만 시험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기억도 분노도 희미해졌다. 어느새 나는 이 일은 모두 잊고 시험 준비에만 빠져 있었다. 돌아보니 이렇게 그냥 넘어간 건 비슷한 불행을 부르는 씨앗을 심은 셈이었다. 잘못을 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가해자는 ‘쟤는 이래도 가만히 있네’하고 나를 만만하게 본 것 같다. 약 1년 뒤 나는 또 그에게 추행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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