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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추행 1차

by 이영 Mar 02. 2025

첫 번째 성추행을 당한 장소는 가해자가 30년 이상 경영한 그의 회사였다. 공장 견학 행사차 그곳에 갔다. 외부 손님도 오는 큰 행사로 유일한 실무자인 나는 행사를 잘 마치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다 먹고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식사를 마친 사람은 먼저 다음 장소로 출발해 당시 식당 안엔 나를 포함해 3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밖에서 배웅을 하던 가해자가 입구에 나타났다. 눈이 마주쳐 큰 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건넸다. 


가해자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다가왔다. 식당은 물소리,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 등 주방에서 설거지 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가 하는 말을 잘 듣기 위해 마주 보는 방향이 아닌, “ㅏ” 모양처럼 가해자 정면에 내 몸 왼쪽이 향하게 서서 귀를 가까이 댔다. 순간 가해자가 “수고했어요” 하며 오른손으로 내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등 날갯죽지 아래 브래지어 끈 있는 부분을 스쳐 팔뚝 뒷부분 살을 움켜쥐는 손의 움직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느껴졌다. 가해자 손바닥이 내 팔뚝에, 손등은 몸통 갈비뼈에 닿았고 손가락 끝은 가슴이 시작되는 부분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있었다. 잘못 움직였다간 가슴이 제대로 닿을 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으며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식판을 반납하던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슬그머니 손을 풀고 천연덕스럽게 그들과 얘기하는 가해자를 보니 분노가 올라왔다. 당장 고함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럼 이목이 집중되고 분위기가 싸해질 텐데 여긴 가해자의 회사였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또, 지금은 행사 중이고 나는 유일한 실무자였다. 분위기를 깨서 행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폭발할 것 같은 화를 꾹꾹 누르다 “얼른 가자”는 재촉에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섰다. 


그렇다고 그 일이 진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어릴 적 남자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여자 팔뚝 살을 만지는 느낌은 가슴을 만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걸 모르는 남자는 세상에 한 명도 없다고도 했다. 가해자는 나보다 30살은 더 많은 70대의 노인이었고 그 업계에서 권위 있는, 평소 나도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나를 성추행하다니 인지부조화가 왔다. 말 그대로 수고했다고 격려하려다 실수한 건데 내가 오버했나? 몇 번을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신체 부위를 굳이 움켜잡은 건 격려도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무엇보다 그 순간 내 몸이 느낀 수치, 불쾌, 분노가 그 증거였다. 전철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랬으면 바로 조치를 취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말 한마디로 나를 해고할 수 있는 상사였다. 취업 스트레스로 공황발작까지 겪으며 이곳에 들어왔기에 괜히 신고했다가 다시 구직을 해야할까봐 겁이 났다. 또 이 무렵엔 아토피성 피부병과 1년 반 넘게 준비한 시험을 50일 앞두고 받는 공시 스트레스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라 다른 일에 쓸 에너지가 없었다. 


화는 나는데 이 상황에서 에너지를 더 써야 하는 뭔가를 만들고 싶진 않아 고민만 하다 시간이 흘렀다. 처음엔 분노로 머리가 쿵쾅거려 공부도 안 됐지만 시험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기억도 분노도 희미해졌다. 어느새 나는 이 일은 모두 잊고 시험 준비에만 빠져 있었다. 당시엔 다행이었으나 이렇게 그냥 넘어간 건 비슷한 불행을 부르는 씨앗을 심은 셈이었다. 잘못을 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가해자는 ‘쟤는 이래도 가만히 있네’하고 나를 만만하게 본 것 같다. 약 1년 뒤 가해자는 나를 또 추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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