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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다녀야 하는 이유

무법지대, 5인 미만 사업장

by 이영

가해자에게 문자를 보내고 9개월 뒤이자 정기총회 한달 전, 결국 해고예정통보서를 받았다. 해고 통보를 받기 몇달 전, 왠지 다음 정기총회에서 가해자와 그의 측근이 임원이 되고, 이들이 나를 해고할 것 같았다. 이 느낌이 어찌나 강력한지 월세 방을 빼서 고정지출을 줄이고 이력서도 넣으며 실직을 대비했다. 얼마 뒤엔 실제로 "가해자 무리가 너를 해고할 거다. 노무사한테 다 알아봤다더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준비했고, 미리 들어 알고 있었는데도 진짜로 해고 통보서를 받으니 가슴이 철렁했다.


해고 사유는 계약 기간 종료였다. 그런데 나는 정규직이었다. 게다가 해고 통보자도 현 회장이 아니라 가해자의 최측근인 차기 회장 내정자였다. 일반 회사였다면 이런 허술한 해고통보서는 효력이 없었겠지만 여기선 가능했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기에 근무하는 6년 내내 괜히 해고될까봐 늘 불안했다. 그래서 성추행을 두 번이나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두려워 하던 해고를 당하니 해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원이 사무실에 상주하지 않는 사단법인 특성 상, 평소 전화나 카톡으로 업무 연락을 자주 한다. 가해자가 임원이 되면 연락을 자주 해야하고, 그건 나도 불편하다. 또, 5인 미만 사업장이기에 해고 사유가 뭐든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니 “그동안 수고했다”고 좋게 마무리 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 그 어떤 부연도 없이 카톡으로 해고통보서만 달랑 보내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마지막 출근 날까지 가해자 분리조치 요청 무시, 폭언, 비아냥 등 갑질이 이어졌다. 나는 저들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겐, 옆에 있는 내가 민망할정도로 얼마나 조심하는지 가까이에서 자주 봐서 잘 안다. 비록 본성이 비열하다 하더라도 선을 안 넘으려면, 안 넘을수도 있는 사람들이 나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근로기준법 보호조차 못 받는 사회적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갑을 관계는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적용된다. 그동안 내가 당하고만 있던 건, 오랫동안 남의 사무실에 더부살이 하며 심리적으로 위축됐고, 무엇보다 해고가 두려웠기 때문이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무례함은 나조차도 잊고있던 이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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