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날이었다.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퇴근이니 예의를 갖춰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했다. 가식적일지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매너있게 대해줄 줄 알았던 순진한 기대는 이내 박살 났다. 몇 분 전, 후임자가 구해지면 댓가 없이 나와서 인수인계를 하라는 지시를 거절당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 명이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소리를 질렀다. 핸드폰을 꺼내 녹음기를 켜고 다시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비아냥 거렸다. 이 말이 6년간 일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다.
심장이 쿵쾅거려 몇 주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공원에서 달리고, 명상을 해도 풀리지 않은 화가 머리 뚜껑을 열고 나와 귀 옆에서 쿵쿵 발을 구르며 밤새 내 머리를 흔들었다. 눈은 실핏줄이 터져 벌게지고 귀에선 하루 종일 삐- 소리가 들렸다. 감각도 둔해지며 몸이 점점 상하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나중에 더 큰 병에 걸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대체의학에선 억누른 화가 관절염, 아토피 등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킨다고 본다. 일반 의학에서도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행복하게 사는 게 진정한 복수다. 다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이성과 달리 몸은 "열받아 죽겠으니 뭐라도 해!" 외치고 있었다. 먼 훗날 이 일을 떠올리는 나를 상상해 봤다. 아무것도 안 해보고 그냥 잊으려 했던 이때의 내가 너무 실망스럽고 싫을 것 같았다. 내가 나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나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했다. 잊는 건 그 답이 아니었다. 그날 밤, 몇 주 동안 외면하기만 했던 분노와 비로소 마주했다. “니가 계속 참기만 하니까 이 지경이 됐잖아! 왜 이렇게 나를 억누르는 거야?”
나는 화를 잘 못 낸다. 화가 나면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아 어버버 하다 잠들기 전 ‘아까 이렇게 말할걸!’ 뒤늦게 할 말이 떠올라 씩씩거리며 며칠을 잠못 이룬다. 모태신앙으로 한글을 깨치기 전부터 "용서하라, 사랑하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복 받고, 노하게 하면 벌 받는다"라는 설교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갖게 된 '용서=선=복 받음, 분노=악=벌 받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집에서 자주 들은 "너가 참으면 남들이 편해. 그러니까 참아"라는 말이 결합돼 일단 참게 됐다. 내가 뭘 참는지도 모르던 때부터.
정신분석학에서는 '1. 인간의 의식은 수면 위로 보이는 빙산의 일각이고 무의식은 그 크기를 다 알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다. 2. 사람은 의식적으로 산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무의식적으로 산다'고 한다. 성추행에 바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인 해고에 대한 두려움, 당시 처한 상황(피부병, 고시 스트레스 등)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무의식을 해결하지 않으면 또 이렇게 처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화를 더 키우는 상황이 되풀이될 것 같았다.
살다 보면 강약약강 하는 사람을 만난다. 전문가는 이런 사람에겐 처음부터 불쾌한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한 뒤 거리를 두라고 조언한다. 아무리 상대가 직장 상사라도 선을 넘어오면 즉각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람도 세상엔 분명 있다. 만약 나도 처음 추행 당한 그 순간 '어? 이건 뭐지? 화?? 안 돼!! 화내면 안 돼!! 복 받으려면 용서해!!'가 아니라, '화가 나네! 왜? 이 사람이 방금 선을 넘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말을 하자! or 싸대기를 갈기자!'처럼 분노를 인정하고 어떻게든 반응했다면 부당해고 당하는 시기는 앞당겨졌을지언정 이렇게 2차, 3차 피해에 폭언까지 듣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분노는 무조건 참아야 하는 나쁜 감정이라고만 생각해 나도 모르게 억누르기만 했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분노는 나 자신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였다. 또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좋은 사람들만 만나길 바랄 게 아니라 분노를 이용해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용서하는 게 제일 좋다지만 솔직한 내 마음이 ‘화가 난다’라면 이 마음을 먼저 인정해야 했다. 그래야 용서도 할 수 있는 거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잘못한 댓가를 치루게 해주겠다 결심했다. 그러자 이번엔 두려움이 몰려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것처럼 괜히 나만 산산이 부서질까 봐 겁이 많이 났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 했다.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잠재의식에 '나는 약자라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어'라고 새겨질 게 뻔했다. 최악이었다. ‘화내는 건 나쁜 거야, 신에게 복 받으려면 화내면 안 돼, 내 감정보다 남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게 더 중요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 미움받을 거야’ 등 복을 받기는커녕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으며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온갖 오해로 가득한 무의식도 바로잡으려면 두려워도 행동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분노를 오해한 것처럼 용기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용기는 두려워도 한 걸음 내딛는 바로 그 힘이었다. 앞으론 분노를 무기 삼아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마침내 고소라는 행동으로 옮겼다. 분노가 용기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