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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운명.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이유

by 이영

그날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을 기분 좋게 감상하다 느닷없이 ‘아, 나는 고소 같은 거 안 해봐서 정말 다행이야. 앞으로도 이런 일엔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인과 관련된 고소 뉴스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도 아니었고, 고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예쁜 날씨에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왜 들지 싶었다. 나중에 알았다. 내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이 순간은 중요한 복선이었다. 불과 몇 달 뒤, 평생 생각도 안 해본 고소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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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고소하고 싶었다. 근데 이 정도로 고소를 해도 되나? "큰일도 많고 바쁜데 고작 이런 일로 찾아오냐"고 영화에서처럼 경찰이 핀잔주면 어쩌지? 고소는 연예인이나 재벌처럼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하는 거 아닌가? 나처럼 쥐뿔도 없는 사람이 해도 되는 건가? 가해자는 기업 대표에 비싸기로 유명한 주상복합에 사는 부자이니 분명 비싼 변호사를 선임할 테고 증거는 이 문자 밖에 없는데. 나 혼자 하다 저쪽 전략에 말려서 괜히 지면 어떡하지? 재판에서 지면 상대방 변호사 비용도 내가 다 물어줘야 하잖아. 걱정이 엄청 됐다.


이런 걱정이 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믿음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에 20대엔 절망했고 30대엔 적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자각도 못할 만큼 완전히 익숙해진 40대, 뜻밖의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 '너는 니가 진짜로 뭘 믿고 사는지 아직도 모르니? 계속 그 믿음대로 살래? 아니면 바꿔볼래?'


더 이상 비련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도 이 고소는 인생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을 바꿀 계기가 될 거란 작은 확신이 들었다. 행여 재판에 져서 모아놓은 돈을 다 쓰고 빚까지 생긴다 하더라도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만큼 억울했고, 그만큼 간절했다.


상대방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는 건 민사 소송이고 형사 소송의 경우엔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이때만 해도 몰랐다. 고소를 하고도 6개월쯤 지난 뒤에야 알았다. 이렇게 고소에 대해 아무 지식 없이 가해자가 미안하다 사과한 문자만 갖고 무작정 경찰서로 향했다. 실수였다. 처음부터 변호사를 선임했어야 했다.


과정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었다. 정말 내가 바뀌길 원하는지 삶이 내 의지를 시험할 것 같았다. 이 느낌처럼 나는 고소를 했을 때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의 과정을 경험하며 그때마다 '여기서 포기할래? 계속 해볼래?' 내 의지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처음부터 변호사와 함께 했으면 이 정도 고생은 안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만큼 단단해지지도 않았을테니 다 필요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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