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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시간: 가장 완벽한 때를 위해 기다려야 했던 시간

분노는 원동력

by 이영

바위에 손이 깔려 127시간 동안 협곡에 갇혀있다 스스로 손을 자르고 탈출한 아론 랠스턴에 대한 실화 영화와 책 <127시간>을 소개합니다.






2003년 어느 금요일 오후, 등반이 취미이던 아론 랠스턴은 홀로 미국의 대표적인 캐년 중 하나인 유타주 블루존 캐년 등반에 나섰습니다. 해방감을 느끼며 아무도 없는 광활한 협곡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던 중 갑자기 위에서 바위가 떨어졌습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협곡 벽과 바위 사이에 손이 꽉 끼어버립니다.


스크린샷 2025-03-05 오전 9.52.26.png 픽사베이


마치 동네 뒷산 산책하듯 가볍게 나온 운동이라 챙겨 나온 물품은 물 1리터와 산악용 로프, 캠코더 그리고 작은 칼뿐이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오늘 당장 실종 신고가 되지도 않을 테고, 누군가 지나갈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하는데 그때까지 이것만으로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며칠 뒤 월요일. 아론이 출근하지 않자 회사에선 그의 본가로 연락을 했고 사고 3일 만에 드디어 실종 신고가 들어갑니다. 주말에 쉬고 출근한 공원 관리자 역시 아침 일찍부터 주차되어 있는 아론의 차를 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 뒤 차의 주인이 실종된 아론인 것으로 밝혀졌고 마침내 수색이 시작됩니다.


그 시각 이런 상황을 알리 없는 아론은 방전된 캠코더 배터리처럼 체력이 바닥났습니다. 이젠 구조를 기다리는지 죽음을 기다리는지 삶에 대한 의지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한편 바위틈에 꽉 낀 손은 피가 통하지 않으니 썩기 시작해 어깨 쪽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결국엔 굶어 죽을 텐데 그전에 괴사가 온몸에 번져 더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론은 팔을 자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지만 팔을 안 잘라도 죽을 테니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요.


칼날이 무뎌 생각보다 작업이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제 마지막으로 뼈만 자르면 되는데 이 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망설이던 찰나, 본능적으로 팔을 꺾었더니 뼈가 툭 부러졌습니다. 이 순간 아론은 의외로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쉽게 부러지는데 지금까지 저 무딘 칼로 이 고생을 했다니!!


통증도 잊고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 한 손만으로 로프를 이용해 협곡 틈에서 127시간 만에 간신히 지상으로 올라온 아론은 실종자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던 다른 등반인에게 바로 발견돼 도움을 받았고, 또 마침 그 근처에 있던 수색 헬기에 금방 탑승해 목숨을 구했습니다.


ㅇ 아론이 팔을 자른 시간은 40분으로 추정됩니다. 잘린 손과 팔 일부는 바위 밑에서 회수됐습니다. 그 바위를 옮기는 데는 성인 남자 13명, 윈치, 유압잭이 필요했습니다. 발견된 손은 화장되었습니다.

ㅇ 구조 당시 아론은 전체 혈액의 25%를 잃은 상태였고 조금만 늦었어도 과다출혈로 사망할 뻔했습니다.






목숨을 건진 이후에도 아론은 여전히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팔을 자를 거면 진작 할 걸 127시간, 무려 엿새동안 왜 그 고생을 한 건지 화가 났고, 팔을 자를 때도 비틀어서 부러트리니 한 번에 쉽게 되는 걸 40분 동안이나 마그마에 팔을 담근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 고생을 한 게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보니 127시간을 버티고 마침 바로 그때 지상으로 올라왔기에 살 수 있었다는 게 보였습니다. 블루존 캐년은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발견돼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습니다.


아론이 팔을 자르고 올라오자마자 실종자가 있다는 소식을 아는 사람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습니다. 그 가족은 온몸이 피로 물든 아론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물을 먹여주고, 바로 관리소에 신고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03-05 오전 9.53.48.png 핼러윈 분장을 한 아론 랠스턴



아론이 바로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게 수색 헬기가 그 근처에 있던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아니라 주말이었다면, 운 좋게 누군가에게 발견돼 신고를 해주었다 하더라도 헬기를 기다리는 동안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터였습니다.


그 넓은 블루존 캐년에서 그 가족이 마침 그때 그곳을 지날 확률은? 마침 수색 헬기가 그 근처에 와있을 확률은? 이 낮고 낮은 확률이 교차하는 완벽한 그때가 아니었다면 아론은 힘겹게 탈출에 성공했어도 결국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그는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 분노 호르몬은 우리 몸을 출발선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100m 달리기 선수 같은 상태로 만듭니다. 비록 아론은 한 번에 쉽게 부러트릴 수 있는 팔을 40분 동안 자르느라 헛수고했다고 격노했지만 계속 피를 흘리며 한 팔로만 로프를 잡고 올라오려면 이 강력한 분노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봅니다. (저도 이런 강력한 분노 덕택에 높은 지위와 부를 가진 성추행 가해자와 싸워볼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함께 봐주세요)






시간이 한참 지나야지만 그 위기가 기회였음을, 그 불운이 행운의 마중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나 자신 또는 하늘을 원망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지금도 신의 완벽한 타이밍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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