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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근친 성폭행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외면하던 상처를 치유해 나간 10년 기

by 이영

도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자는 유년 시절 할아버지에게 몇 년간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일을 마치 없던 일인 듯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그녀는 하버드 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우연히 '리키 랭글리'라는 아동성범죄자를 알게 되고, 이상하리만큼 그에게 유난히 분노하는 자신을 깨닫습니다. 이후 뭔가에 홀린 듯 리키 랭글리에 대해 파고들며 그동안 감당하기 어려워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상처를 대면합니다. 저자는 기억하는 것조차 끔찍한 고통을 치유하는 기나긴 여정을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에 담았습니다.




1. 기억하지 못하면서 기억하는 것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저자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는 5살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수년간 성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여동생에게도 끔찍한 짓을 했습니다. 저자는 할아버지가 내 방이 아닌, 동생 방으로 가는 소리를 들으면 안도감이 느껴지는 한편 불안함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물론 당시엔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 몰랐고, 성인이 된 후에야 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이건 우리 사이의 비밀이고 네가 이 일을 말하면 배신자가 되는 거다"라고 다정하게(?) 협박했습니다. 그녀는 성범죄 피해 아동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말에 속아 몇 년 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살쯤 됐을 무렵 당시 5살이었던 막내 여동생이 5달러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본 엄마가 돈의 출처를 물었고, "무릎에 앉아있었더니 할아버지가 줬어"라는 대답에 마침내 그 추악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그 사건을 그냥 묻어버렸습니다. 이 일은 저자가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로 크나큰 상처와 무력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동성애범죄자 리키 랭글리


리키 랭글리는 어린 시절 불우하게 자랐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온 식구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이 죽었고, 엄마는 병원 침대 위에서 하반신이 석고 붕대로 고정된 채 몇 달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엄마의 하반신이 배변/배뇨를 위해 생식기 부분만 구멍이 뚫린 석고 붕대로 고정돼 있던 이때! 리키 랭글리가 잉태됐습니다.


임신 사실을 몰랐기에 엄마는 온갖 약을 먹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몰래 술도 엄청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리키는 겉으로 볼 땐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2.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하는


알렉산드리아


시간이 흘러 법학을 전공하게 된 알렉산드리아. 어렸을 때부터 막연한 이유로 사형을 반대했고 신념에 따라 사형수를 변호하는 로펌에 인턴으로 간 첫날, 5살 남자아이를 죽여 살인 선고를 받은 리키 랭글리에 대해 알게 됩니다. 평소 사형을 반대했지만 막상 리키 랭글리를 보니 사형이 마땅하다는 강렬한 분노를 느낍니다.


법학을 선택한 이유,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 리키 랭글리를 보고 분노가 치민 이유, 평소 신념과 달리 사형을 바라게 된 이유. 이 모든 게 어린 시절 겪은, 처음엔 기억도 안 났던 성폭행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기억은 못했지만 이 일은 저자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리키 랭글리


리키 랭글리는 5살 때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그 존재조차 몰랐던 형을 꿈에서 봤습니다. 이때부터 종종 환영인지 진짜 귀신인지 꿈속에서 본 형이 나타나 리키는 5살 때 꾼 이 꿈을 평생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리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증언은 엇갈립니다. 그래도 리키가 죽은 형을 보고 혼자 대화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3. 우연, 선택 그리고 해방


우연

알렉산드리아가 인턴으로 출근한 첫날, 마침 시간이 남아 담당자가 비디오를 틀어줬습니다. 그 비디오는 또 마침 아동 성범죄자 리키 랭글리를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선택

그동안 사형을 반대했지만 막상 리키 랭글리를 보자 평정심을 잃고 분노에 차올라 사형을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냥 모른척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양심에 따라 변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역시나 외면할 수도 있었던 그 강렬한 끌림에 순응하기를 선택했습니다.



해방

그렇게 리키 랭글리를 알아가며 알렉산드리아는 리키를, 자신을 학대한 할아버지를, 침묵을 선택한 가족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동 성폭행 피해자임을, 기억은 흐릿해도 몸에 선명히 남아있는 학대당한 흔적을 인정합니다. 그제야 알렉산드리아는 본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자책과 의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몇 줄로 요약했지만 실제로는 약 10년이 걸린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4. 우리 이야기


제가 이 책을 고른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재밌는 스릴러물 없나?'하고 찾다 "하버드생, 법정 실화, 10년의 기록" 문구 중 '법정 실화'에 끌려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골랐지요. 그리고선 책을 폈더니 스릴러가 아닌 마음 공부, 치유 에세이에 가까운 내용이더라구요.


제 3자 입장에서도 읽기 힘든, 본인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울 기억을 용감하게 적어 내려 간 그녀 덕택에 저도 묻어두고만 싶었던 괴로운 일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우연히 이 글을 클릭하셨겠지요? 이 작은 우연이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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