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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조사에선 거짓말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_(1)

by 이영
2024년 2월 어느 날, 고소를 하기 위해 홀로 경찰서를 찾았다. "진술은 혼자 하시겠어요? 변호사랑 같이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 "어떻게 해야 해요?" 되물을 정도로 무지했고, 무지해서 용감했다.


2024년 2월 어느 날, 고소를 하기 위해 홀로 경찰서를 찾았다. 1층 민원실에서 안내받은 여성청소년3팀 사무실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걷다 두꺼운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어!' 다짐하며 문을 열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커다란 창문이 제일 먼저 보였다. 복도의 어둠과 대조되는 환한 빛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둠과 빛 사이, 약 8평 남짓한 공간에 'ㄱ'자 모양으로 책상 6개가 놓여 있었다.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찰나의 어색한 정적을 깨며 누군가 물었다. "성추행 고소하려고요." 그중 유일한 여성 경찰관이 "제가 할게요"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방으로 옮겨 경찰과 단 둘이 마주 앉았다. 경찰은 혼자 왔는지, 고소장은 작성했는지부터 시작해 여러 질문을 했다. 어떤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있었고 어떤 질문은 분명 한국어인데 이해가 안 됐다. 그때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되물어야 했다. "진술은 혼자 하시겠어요? 변호사랑 같이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해요?" 되물을 정도로 무지했고, 그랬기에 용감할 수 있었다.


쏟아지는 낯선 질문들에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다 끝내고 가자 싶었다.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니 변호사 없이 혼자 진술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해자가 보낸 "미안하다"는 문자, 이거면 충분할 거라 믿었다. 고소장을 작성하고 진술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 본 고소장은 약 다섯 문장 남짓, A4 반쪽도 채 되지 않았다. 그땐 몰랐다.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있었다.


며칠 뒤 국선 변호사를 만났다. 고소를 취하하고 싶다 말했다. 살면서 냈던 용기 중 가장 큰 용기를 내 고소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가해자는 유명한 주상복합에 살 정도로 부유하니 분명 비싼 변호사를 선임할 터였다. 여기에 혼자 대응하다 괜히 억울한 일을 당할까 봐 겁이 났다.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사례도 접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괜히 고소해서 그런 일을 겪느니 그냥 여기서 포기하고 싶었다. 변호사는 이미 시작된 일이니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자며 나를 다독였다.


가해자의 회사가 있는 지방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가해자 주소지가 이쪽이라 사건이 이송됐습니다". 아뿔싸. 주소가 그쪽으로 되어있을 줄이야(가해자 주소지 관할 경찰서에서 수사) 가해자는 그 지역에서 30년 넘게 공장을 운영해 왔고, 지금도 그 지방 공장 준공식 같은 기업 행사에는 지역 국회의원이나 군수 같은 정치인이 참석한다. 서울보다 정경유착이 더 끈끈해 보였기에 가해자가 이 일과 관련해 누군가에게 청탁을 하진 않을지 걱정이 됐다.


나는 1979년 생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 문방구 아저씨, 경비 아저씨, 심지어 친척 어른까지 나이 많은 주변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에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대한 개념이 법률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95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때)이다. 이전까진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 개념이 없으니 성추행을 당해도 내가 지금 뭘 당한 건지, 이 느낌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막연히 '나쁘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개념이 널리 퍼지고 나서야 비로소 어릴 적 나쁘다고 뭉퉁그려 기억하던 그 느낌에 성적 수치심, 불쾌함이라는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딸 같아서 그랬다’, ‘예뻐서 그랬다’는 말이 통하던 시대에서 자라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인지하고 용기 내어 고소를 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은 경찰의 목소리를 듣자 고소하러 경찰서를 찾은 날 겪은 일이 떠오르며 불안함이 싹텄다.






다른 방으로 나를 안내했던 경찰이 여성청소년3팀 방으로 돌아가 진술을 해도 괜찮겠냐 물었다. 진술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정확히 몰랐기에 어디서 하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까 그 방, 여러 명의 경찰이 있는 공간에서 진술이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경찰이 "오늘은 비가 오니까 중국집에 시켜먹자. 늦지 않게 지금 시켜라"말했다. 그러고는 내 앞에 앉은 경찰에겐 "이제 점심 시간이니까 빨리 끝내"라고 했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음식이 도착해 몇 명이 다른 방으로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도 진술은 계속 됐다. 잠시 뒤 돌아온 그 경찰은 "아직도 안 끝났어? "라고 말하곤 부산스럽게 사무실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왠지 마음이 조금해졌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술이 마무리됐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심스레 물었다. "가해자한테 고소했다고 말해야 하나요?" 담당 경찰이 대답하기도 전, 아까 그 경찰이 저 뒤에서 끼어들었다. "그걸 왜 말해요? 조용히 있어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저 사람은 아까부터 왜 저럴까? 이유가 무엇이든 민원인인 나에게 그런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건 분명 무례한 일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눈물 닦은 휴지 뭉치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안 버리고 굳이 걸어가 그가 들고 있던 쓰레받기에 일부러 홱 던져넣었다. 그가 내게 보여준 무례함을 그렇게라도 되돌려주고 싶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듯한 경찰 목소리에 이 기억이 다시 떠오르며 불안함이 싹텄다. 더군다나 가해자 가족이 대대로 사업을 해온 지역으로 사건이 이송됐으니 그의 영향력이 작용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기우일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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