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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조사에선 거짓말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2)

나 홀로 고소가 어려운 이유

by 이영
불송치 결정에 반박하기 위해 직접 항고장을 작성하다 성추행 피고소인을 타깃으로 한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성추행 가해자로 고소당하셨나요? 경찰의 기소/불기소 의견을 뒤집긴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경찰 단계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경찰은 이미 제출한 문자 외에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했거나, 일기 같은 다른 증거가 있는지 물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했고 당시 연락을 주고받던 지인 한 명,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상담 센터에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문제는, 이미 몇 달 전 그 지인과 연락을 끊었고, 길을 걷다 감정이 북받쳐 즉흥적으로 검색해 전화한 거라 센터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폰은 발신 기록이 100개까지만 저장돼(이때 처음 알았다) 진작에 발신 기록도 사라졌고, 하필 통신사를 바꿔 예전 통신사에도 기록이 폐기된 뒤였다.


결국 검색되는 모든 관련 기관에 문의했다. 하지만 기록이 남아있는 곳은 없었다. 상담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긴 했다. "올해부터 상담 업무를 중단해 모든 자료를 폐기했다"는 곳이다. 마침 내가 통화한 일요일에도 상담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국번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확실한 것 같았으나 아쉽게도 해당 기관이 자료를 폐기해 기록을 확인할 순 없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지인에게 톡을 보냈다.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며 고맙게도 진술서를 써주겠다던 지인은 "내가 갈 테니 편한 시간을 알려달라"는 카톡을 3일 동안 확인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면 지인에게 '진술서'라는 단어가 굉장히 무겁고 무섭게 다가왔던 것 같다. 걱정을 덜 수 있게 잘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당시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보니 그런 부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서운함만 크게 느껴졌다. 결국 진술서는 받지 못했다.


30만 원이나 들여 포렌식도 받았으나 필요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추가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해자가 행동을 시인하고 사과한 문자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후회하는 부분이다. 어렴풋이 기억난다는 지인의 그 톡이라도 증거로 제출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경찰에게 몇 차례 더 연락이 왔다. 한 번은 경찰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행을 당했는지 물어 "제 왼쪽 팔 윗부분, 뒤쪽을 쥐어 잡고 주물렀어요"라고 대답했다. 며칠 뒤 경찰은 다시 전화해 "손바닥으로 xxx(정확히 못 들음) 했다고요?"라고 내가 언급하지 않은 '손바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저는 손바닥 얘기는 한 적 없고요, 컵을 쥐듯 손가락으로 제 팔뚝 뒤편을 쥐고 주물렀어요" 다시 설명했다. 이 통화를 계기로 핸드폰을 갤럭시로 바꿨다. 통화 녹음을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몇 주 뒤, ‘혐의 없음(증거불충분)’ 통보서를 받았다. 경찰은 내가 ‘손바닥’에 대해 아니라고 정정했음에도 계속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참고인 진술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피고소인이 내 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하고, 이어 고소인의 어깨도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말하는 장면을 분명히 기억한다”라고 진술했다. ‘손바닥’은 "팔을 쥐어 잡았다"는 내 설명보다는 참고인이 묘사한 "두드렸다"는 장면에 더 어울린다. 경찰이 참고인 진술에 비중을 두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통보서엔 참고인이 누군지 명시되지 않았지만 '딸'이라는 단어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사건 당일 딸과 함께 온 사람은 단 한 명으로 가해자의 측근이자 나를 해고한 바로 그였다. 성추행이 벌어진 순간, 참고인도 그의 딸도 현장에 없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그렇기에 경찰은 물론, 고용노동부에도 목격자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렇게 내 진술과 참고인 진술이 전혀 다른데도 경찰이 참고인 진술을 신뢰한다는 건 내 진술이 허위라고 판단한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참고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차피 피고소인이 진술할 테니 피해자인 내 입장에선, 목격자가 없었다고 거짓말해서 진술의 사실여부에 대해 의심받는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다. 또한 많은 관계인 중 하필 참고인이 참고인으로 선정되어 조사를 받고, 거기에 자기가 봤다고 감히 거짓말까지 할 거라고 예상해 미리 아무도 없었다고 거짓말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내가 허위 진술을 했다고 본 경찰이 편파적으로 느껴졌다.


또, 경찰은 가해자에게 보낸 문자 중 “대표님은 그런 의도 없으셨겠지만”라는 쿠션어를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해석했다. 말 한마디로 나를 해고할 수 있는 상사이자 30살이나 많은 어른인 가해자에게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표현한 부분이 가해자에게 고의성이 없다는 근거가 된 것이다. 아무리 법과 일반 상식이 다르다지만 이런 해석은 정말 이해가 안 됐다. 가해자 고향으로 사건이 이송되면서 그의 영향력이 끼칠까 봐 혹시나 하던 중, 이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불송치 통보를 받으니 불신과 억울함이 더 커졌다.




불송치 결정에 반박하기 위해 직접 항고장을 작성하다 성추행 피고소인을 타깃으로 한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성추행 가해자로 고소당하셨나요? 경찰의 기소/불기소 의견을 항고로 바꾸긴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경찰 단계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법정 싸움이 꼭 진실 규명, 피해자 구제를 위함만은 아니라고 듣긴 했으나 막상 이런 광고 문구를 직접 보니 충격이었다.


참고인이나 목격자가 경찰 조사에서 사실과 다른 말을 하더라도 법적으로 문제 삼기 어렵다는 점도 처음 알았다. 수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짓말이 아니라면 ‘기억의 차이’ 정도로 간주되고, 그 말의 진위여부를 떠나 일단 참고인의 말을 가장 신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참고인과 피고소인, 고소인의 관계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법의 세계는 상식의 세계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은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이제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가해자만이 아니었다. 가해자를 위해 나를 부당해고한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한 참고인과도 싸워야 했다. 이제라도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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