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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검찰 조사까지 받을 일이야?

by 이영

경찰의 “불송치(증거 불충분)”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말은, ‘뭔가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재판을 하기엔 증거가 부족하다’는 뜻 아닌가. 경찰도 가해자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의미처럼 들려 더 억울했다. 결국 검찰에 항고장을 제출했다.


몇 주 뒤, 지방검찰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는 통보였다. 검찰 조사는 강력 범죄에만 해당하는 줄 알았기에 ‘이게 정말 검찰 조사까지 받을 일인가’ 싶었다. 영화에서 보던 강압적인 심문 장면이 떠오르며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이 됐다.


“예전엔 회식하면 노래방에서 여직원들이랑 다 부루스 추고 그랬는데..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검색해 보니, 피해자 입장에서는 검찰 출석 요청이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다고 했다. 검찰 항고가 받아들여져 재수사나 기소로 이어질 확률은 대략 4~5%로 매우 희박하지만, 검사가 직접 출석을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상 기소를 전제로 한 최종 확인 차원으로 볼 수 있어 기소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작은 희망이 싹텄다.


국선 변호사와 일정을 맞추다 보니 조사 날짜가 3주 뒤로 잡혔다. 너무 늦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고 혼자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출석 날을 기다리던 중, 인사 발령으로 담당 검사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뀐 검사가 과연 호출한 검사와 같은 시선으로 이 사건을 바라봐줄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검사를 만나기 전 먼저 수사관 조사를 거쳤다. 수사관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본격적인 조사를 앞두고 서류를 훑어보던 그가 불쑥 말했다. “예전엔 회식하면 2차로 노래방 가서 여직원들이랑 다 부루스도 추고 그랬는데..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지? 직장 내 성추행 피해자로 조사를 받으러 온 나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그가 이 사건을 성추행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질문에서도 ‘가해자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지, 부당해고를 당하고 홧김에 복수하려는 건 아닌지’하는 듯한 뉘앙스가 여러 번 묻어 나왔다. 가해자 측이 씌운 프레임을 거의 그대로 믿고 있는 듯했다. 절망이 밀려오는 한편, 저들의 거짓말을 꼭 밝혀내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조사를 받다 참고인이 “(식당) 문 밖에 부인이 있었는데 안에서 그랬겠냐”며 가해자를 두둔하기위해 거짓말한 사실을 알게 됐다. 참고인은 앞서 “식당 안인지 밖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라고도 거짓 진술한 바 있다. 이 두 진술은, 거짓말의 특징이 그러하듯, 서로 모순된다. ‘안에서 그랬겠냐’며 특정 장소를 전제로 반박하면서도 동시에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 데에는 본질을 흐리려는 의도가 있어 보였다. 참고인 진술의 이런 허점을 날카롭게 발견해 파헤치는 수사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걸까?


그리고 가해자의 부인은 이때 없었다. 공장 견학 행사에 대표의 부인이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인상깊이 남아있다. 그녀는 행사 시작 전, 인사만 하고 이후엔 보이지 않았다. 공장을 돌아본 뒤 식당에서 인원을 파악하며 ‘사모님은 식사 안 하시나?’ 생각했던 걸 확실히 기억한다. 내 기억처럼 식사 직전 식당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에도 그녀는 없었다.


조사는 약 4시간가량 이어졌다. 잠시 휴식을 갖고, 마지막으로 검사와 마주했다. 검사가 항고한 고소인을 직접 불러 조사한다면 보통은 사건에 우호적인 관심이 있어서라지만 중간에 바뀐 검사는 내 서류를 방금 처음 본 듯했다. 이미 경찰과 수사관에게 했던 말, 항고장에 쓴 말을 또 반복하며 ‘처음에 오라고 연락 왔을 때 용기 내서 혼자 올 걸’ 후회와 함께 왠지 슬픈 예감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생전 처음 겪는 극심한 복통이 밀려왔다. 병원까지 울면서 간신히 기어갔을 만큼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의사는 스트레스성 위경련이라 진단했다. 며칠 뒤, 검찰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경찰 때와 마찬가지로 "불기소(증거불충분)"이었다. '처음 나를 호출했던 검사에게 조사를 받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용기를 내지 못한 대가가 너무 뼈아팠다. 다시 복통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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