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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잉업 Mar 07. 2024

익숙하지만, 낯선 그녀

그녀를 다시 만나다



몇 달 동안 연락이 잘 닿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대신 궁금함을 선택하기로 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생각이 떠올라도 예상 시나리오를 이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집에 무슨 큰일이 있나?'

카카오톡 화면을 볼 때마다 그녀의 프로필이 달라지진 않았는지, 근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릴없이 열어보았다. 제주도에서 찍었던 환하게 웃고 있는 예쁜 쌍둥이들의 사진은 그대로인데도.

말이 씨가 된다고, 생각 역시 씨가 될까 봐 괜한 짐작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걱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언제고 연락을 해 올 것을 굳게 믿었다.




나에게 주어지는 가장 여유로운 시간은 주중 휴진일이다. 주말에도 애들 챙기는 일은 쉴 수 없으니 말이다. 어느 날, 둘째를 등교시키고 여유롭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 건너편의 아이 친구엄마를 발견했다. 마침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 길을 건넜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민주어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민주는 딸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에 민주 엄마와는 오다가다 애들 키우는 이야기도 하고, 차도 한잔씩 하면서 편하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한해 전 피아노 레슨 선생님을 알아보고 있길래 친구를 민주엄마한테 소개해 주기도 했던 터라 만난 김에 피아노 수업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물어볼 참이었다.


"민주 요즘 피아노 레슨 계속 받고 있어요?"

피아노 레슨은 계속하고 있는 중이라면 큰 일은 아닐 터이다.


"아,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민주 수업 그만 둔지 두 달도 넘었어요. 선생님이 사정이 있으시다고 더 오시기 힘들다고 하셔서 못하게 됐어요. 민주가 선생님 참 좋아했는데, 아쉽게 됐어요."

민주 레슨까지 그만 둘 정도면 무슨 일이 확실히 있는 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요? 저도 연락이 잘 안 되어서 걱정이 좀 돼요."

민주 엄마도 나를 만나면 선생님 안부를 물어볼 참이었다고 했다.


"선생님 참 좋으신 분인데,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다음에 혹시 선생님 연락되면 우리 셋이 같이 식사 한번 할까요?"

"좋죠. 언제 시간 맞춰 봐요. 연락 오면 말씀드릴게요."


좋아하던 레슨까지 그만두었다면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녀가 많이 힘들거나 가족 중에 큰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것. 전화통화 자체가 안 되고, 간간히 톡으로만 답하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후자가 아니라 전자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나의 촉이 강하게 왔다.

'그래도 확실한 건 아니다. 아닐 수 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덥던 여름도 기세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기운이 느껴졌다.

쉬는 날 그녀가 카톡을 보냈다. 애들 학교 보냈을 시간을 계산이라도 한 건지 내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별일 없죠? 다음 주 시간 괜찮아요?'


난 기다렸다는 듯이가 아니라 기다렸으니 냉큼 답장을 보냈다.

'그럼요. 언제 얼굴 볼까요?'


그렇게 해를 넘겨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자주 만나던 카페는 호텔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성급 호텔까진 아니지만, 서울관광객들에게 꽤 괜찮은 숙소로 알려져 있는 깔끔한 호텔이었다. 1층에 자리 잡은 프랜차이즈 카페는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었다. 호텔에 걸맞게 층고가 높아 탁 트인 느낌이 시원했고, 프랜차이즈 카페지만 이곳만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무엇보다 북적이지 않고, 동네 아는 엄마들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그녀가 이미 먼저 나와 있었다. 입구를 등 지고 앉아 있었지만, 약간 때 이른 퀼팅 재킷 덕분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등을 보면서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ㅇㅇ씨, 어떻게 지냈어요?"

우리는 서로가 친구라고 여기지만, 서로 존대하는 사이였다. 내가 말을 잘 놓지 않는 편이라 알고 지낸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호칭만은 선생님에서 조금 편안한 ㅇㅇ씨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눈이 마주치기도 급한 마음에 인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살집이 많았던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둘은 다이어트 타령을 종종 할 정도였는데, 족10킬로 이상 빠졌을 같은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마른 자신어떻게 비칠지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이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힘없는 미소를 보냈다.

"그동안 일이 좀 있었어요. 진작에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애들 잘 있죠?"


나는 말을 줄이고, 그녀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변함없이 그녀는 편안한 사람이었고, 자주 웃으며 그동안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건강검진을 했다가 암을 발견했고, 초기는 아니어서 생각보다 힘든 고비가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끝났고,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병원 들락거리느라 좀 힘들었어요. 아직 항암이 몇 번 더 남긴 했는데, 다행히 S 대학병원이 가까워서 입원하더라도 지내기가 편해요."


몇 개월의 일을 다 겪어내고 담담히 털어놓는 그녀는 연락 없이 걱정하게 만든 자신의 미안함을 두고두고 표현했다. 짐작하면서도 자세히 묻지 못했다.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진행이 되었냐고, 병원에서 구체적으로 뭐라고 설명을 들었냐고, 앞으로 치료는 어떻게 진행될 거냐고 꼬치꼬치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거의 묻지 않았다. 한두 마디의 단어들로 그녀의 상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묻는 것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뿐이며, 현실을 좀 잊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그동안 너무 고생했네요. 그래도 항암 잘 견디고 있으니 천만다행이에요."

그녀는 이제라도 다 얘기할 수 있어 홀가분해 보였다. 두 딸은 씩씩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고 했다. 엄마가 며칠씩 입원하느라 자리를 비워도 외할머니 힘들지 않게 자기 숙제는 알아서 잘 챙긴다고 많이 컸다며 쌍둥이들의 안부를 전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딸들이 엄마 문병을 올 때면 손 편지에 그림을 그려서 가져오기도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우린 그렇게 진짜 안부를 확인했고, 항암치료하러 입원하게 되면 연락을 주기로 했다. 하루종일 병실에만 있기 심심하다는 그녀를 위해 이야기 동무를 해 주겠다고 했고, 그 뒤로 두어 번 창 밖 풍경이 아름다웠던 그녀의 병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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