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링이 다른 영창 피아노

by 변희영

어느 집이 이사를 오는 모양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내 눈에 카펫으로 둘둘 감긴 물건 하나가 걸려들었다. 이삿짐 트럭 옆에 우뚝 남아 있던 그것은 피아노였다. 짐꾼들이 주차장에 피아노를 부려놓은 것이었다. 다른 짐들은 이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듯 열린 트럭 문으로 휑한 내부가 훤히 보였다. 밝은 햇살 아래였지만, 피아노가 깔고 앉은 아스팔트 바닥은 차가워 보였다. 11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다. 몸을 타고 냉기가 올라오는 듯 나는 으스스 추위를 느꼈다.


엄마가 피아노를 사들인 때는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그렇다면 아마 1975년 경이었을 것이다. 오십만 원을 주고 피아노를 구입하기위해 엄마는 삼 년짜리 적금을 부었다고 했다.

“엄마는 어렸을 적에 피아노를 치는 게 소원이었어. 우리 동네 제일 부잣집에서 매일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거든. 그 집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였어. 그때부터 결심했지. 나중에 딸을 낳으면 꼭 피아노를 사야겠다고 말이야.”

엄마가 말한 부잣집은 6.25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고 했다. 여느 날처럼 부잣집 앞의 공터로 친구들과 놀러 갔는데 한 떼의 인민군들이 모여 있었다고 했다. 그 집은 이층집이었는데 늘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유리창은 죄다 깨져서 험한 꼴로 변해 있었다. 엄마는 겁이 나서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인민군 중 누군가 엄마와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왜 왔냐고, 이 동네 사냐고, 아마도 그런 질문들이었을 거라고 엄마는 회상했다. 그들은 친절했다. 얼마든지 이곳에 와서 놀아도 된다고 그들은 큰 호의라도 베푸는 듯 말했지만 실은 꼭 왔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놀았다. 고무줄놀이는 늘 즐거웠고 그곳은 익숙한 공간이었으므로 굳이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곳에 동네 아저씨 같은 인민군 병사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부잣집을 지키고 있던 그들은 무료해보였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뜬금없이 끼어들거나 아이들 중 누가 반칙을 했다고 일러바치기도 했다. 어느날인가는 노래할 줄 아냐고, 아는 노래 있으면 한 번 불러보지 않겠냐고도 했다. 엄마는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였으므로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노래를 부르면 인민군들은 박수를 치거나 가끔 따라 부르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잘했다고 칭찬하며 먹을 것을 나눠 주었다. 엿이나 떡이나 하는, 그것들은 그들의 간식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그들이 무섭지 않았지만 부서지고 깨져버린 이층집은 어쩐지 서늘했다. 피아노를 치던 소녀는 어디 갔을까, 엄마의 상상 속에서 소녀는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리본 핀을 꽂은 채 작고 하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며 춤추듯 몸을 움직이곤 했다. '언젠가는 소녀를 볼 수 있을지 몰라.' 엄마는 이층집 앞에 서서 소녀의 방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 이층집은 폭격을 맞아 흉물이 돼 버렸고 소녀의 모습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소녀에 관해 인민군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묻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대신 나중에 나중에 엄마가 딸을 낳으면 소녀 같은 옷을 입히고 피아노도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중에 나중에 엄마는 정말로 딸을 낳았다. 그것도 세 명씩이나.


피아노를 칠 줄도 모르는 당신이 왜 비싼 피아노를 샀는지에 대해, 엄마는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러므로 딸을 셋이나 낳은 엄마에게 피아노를 사들이는 것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엄마는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삼 년 동안 꼬박 꼬박 적금을 부어서, (엄마 말에 의하면)당시로는 집 한 채를 구입할 수 있었던 돈으로, 피아노를 샀다.

그 시절 내가 살던 청량리에 피아노가 있는 집은 매우 드물었다. 친구들과 누구 집이 더 부자냐 하고 내기를 하면 금방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나 전화기가 있는 집은 가물에 콩 나듯 해도 찾을 수 있었지만, 피아노가 있는 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부자가 아니었던 우리집 형편에 피아노를 사들인 것은 엄마의 허영이 최고점을 찍은 특별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날인가 언니와 오빠가 등교한 후 대문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지? 신발을 꿰차는 내 눈앞에서 대문이 왈칵 열렸다. 앞장선 엄마의 뒤를 따라 장정 몇 명이 시커먼 물건을 받쳐 들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지켜보고 섰던 나를 옆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비켜! 다쳐!”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장정들은 집안으로 사라졌다. 엄마가 내게 비키라고 소리쳤으므로 그럴 때는 몸을 움츠리고 사태에 주의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집안에서 밖으로 나와 트럭을 타고 가버릴 때까지 나는 마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엄마의 모습은 나타나질 않았고 나는 더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엄마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피아노가 있었다. 벽 두 군데를 가득 채우던 아빠의 책장을 옆으로 밀어내고 개선장군처럼 피아노가 들어선 것이었다. 새까만 ‘영창’ 피아노였다. 엄마는 피아노를 닦고 문지르고 보물처럼 아꼈으므로 그것은 늘 반짝댔다. 아침이면 햇빛에 번들댔고 저녁이면 등불에 반사돼 윤이 났다.

그러나 피아노는 전화기나 텔레비전보다 생소한 물건이었다. 언니와 나는 길다란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을 마구 뚱땅대거나, 피아노 의자의 뚜껑을 여닫으며 장난만 쳤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피아노란 값비싼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신기해하는 것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다.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엉뚱하게도 피아노 의자였다. 뚜껑을 여닫을 수 있는 피아노 의자는 어느새 우리들 보물 상자로 변했다. 의자의 뚜껑을 열면 언니와 내가 아꼈던 물건들로 가득했다. 피아노 의자는 종이 인형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작고 가벼운 종이 인형은 툭하면 구겨지거나 찢기기 일쑤였고, 그것을 보관할 그럴듯한 종이 상자 하나 얻기 힘든 시절이었다. 언니와 나는 보물을 발견한 듯 신이 났다. 피아노 의자 안에서 종이 인형들이 안전했으므로 우리는 다른 아끼는 물건들을 그곳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종이 반지며 머리핀 같은, 또는 속이 투명한 구슬이나 잘 접힌 딱지도 의자 안에 넣어 두었다. 어느새 의자 안에는 언니와 내가 쑤셔 넣은 보물 아닌 보물들로 가득 찼다.


“피아노를 배우러 가자.”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언니는 이미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같은 선생님께 배우게 됐지만 나는 따로 가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말하자면 개인 레슨이었다. 피아노를 가르쳐준다는 선생님 댁은 일곱 살였던 내 걸음으로 십여 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그날, 콧구멍 안의 콧물이 얼어들던 겨울부터 샛노란 개나리가 피던 초봄까지, 나는 그 길을 오고 갔다.

엄마의 손에 끌려 피아노 선생님 댁을 처음 찾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할까봐 겁이 났던 것이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머뭇대던 나에게 선생님은 피아노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돌처럼 몸이 굳어 버렸고 뜬금없이 오줌이 마려웠다. 그런데 나를 그렇게 앉혀 놓고 선생님은 엄마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엄마의 대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아랫배가 팽팽해졌다. 이러다간 오줌을 싸버리고 말 것 같았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은 차마 화장실을 찾지 못했고, 나는 하릴없이 오줌을 참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나를 불렀다. “너 왜 그렇게 몸을 배배 꼬고 앉아 있는 거야? 혹시 화장실 가고 싶니?” 내 인생에 그때만큼 엄마가 구세주처럼 보인 적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선생님의 손에 의해 화장실로 인도됐다.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기다렸지만, 오줌은 한두 방울만 떨어진 후 소식이 없었다. 피아노 건반의 무게만큼 무거운 마음으로 나는 바지를 추슬러야했다.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엄마는 선생님께 나를 부탁하고는 먼저 돌아가 버렸다. 선생님은 멀뚱히 앉은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피아노 열쇠 구멍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가 니 배꼽이 만나는 위치야.”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열쇠 구멍에 배꼽을 갖다 댔다. “아니, 배꼽을 붙이지는 말고 일직선으로, 그렇지... 앞으로는 이렇게 앉아서 피아노를 치는 거야.”

배꼽과 열쇠 구멍을 마주 보게 한 후, 선생님은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잡고 ‘도’자리를 눌렀다. 묵직한 ‘도’ 소리가 났다. 다음에는 집게손가락을 잡고 ‘레’ 건반을 눌렀다. 다섯 개의 손가락들이 차례차례로 선생님의 손에 끌려 건반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새끼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를 때, 아직 여물지 못했던 새끼손가락은 건반의 중앙을 살짝 빗겨나갔다. ‘솔’ 소리가 뭉개졌다. 손가락이 아팠다. 선생님은 다시 한번 눌러보라며, 새끼손가락을 꽉 잡았고 새끼손가락은 선생님의 손가락에 깔려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도,레,미,파,솔.’ 다섯 음을 다섯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눌러보는 일, 그것이 피아노 레슨의 첫날 내가 배운 것이었다. 각각의 손가락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 제 소리 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선생님은 한 번 더 해보자며 내 손가락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조금 더 내 옆으로 바투 붙어 앉았다. 선생님이 내 옆에 너무나 바짝 붙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잘 맞춰져 있던 내 배꼽과 열쇠 구멍이 서로 어긋났다. 조금만 왼쪽으로 움직이면 배꼽을 맞출 수 있는데 선생님은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선생님 쪽으로 엉덩이를 밀어봤지만, 선생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오히려 선생님의 엉덩이 힘에 밀려 나는 조금씩 더 옆으로 밀렸났고 그럴 때마다 구명보트를 놓친 듯 나는 절망스러웠다. ‘선생님 배꼽이 구멍에서 자꾸 멀어져요.’ 비명처럼 소리를 토해낼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어쩐지 창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힘껏 엉덩이를 누르고 밀려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자리를 사수했다. 건반 누르기만 열중하던 선생님은 울상이 된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선생님도 자리를 버티고 움직이지 않는 나를 어쩌지 못했는지 선생님의 다리가 내 다리를 지그시 누르며 올라왔다. 그때 선생님은 노트 위에 오선지를 그리고 있었다. 이어서 콩나물 머리를 새까맣게 칠하고 하나씩의 계이름을 일러주던 선생님은 어느새 당신의 다리에 깔린 내 다리 따위는 감각에 없는 듯했다. 선생님의 허벅지 무게는 상당했다. 이 천근만근한 허벅지에 깔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몰려올 때쯤 레슨은 끝이 났다. “열 번만 더 연습해봐라.”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눌렸던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자리를 옮겼다. 열쇠 구멍에 배꼽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직선으로 배꼽과 열쇠 구멍을 맞추고 앉은 후에야, 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홀가분해졌다.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보면, 새댁이었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아기는 툭하면 울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다 말고 안방으로 튀어 가곤 했다. 아기의 울음은 피아노 소리에 묻혀 나에겐 잘 들리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귀신처럼 알아 듣고 번개처럼 뛰쳐나갔다.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선생님의 등짝엔 포대기로 둘러맨 아기가 업혀 있었다. 그래도 아기는 울음을 쉽게 그치지 않고 선생님의 등에 붙어 칭얼댔다. 가끔은 내게 아기를 보고 있으라 하고 선생님이 밖에 다녀올 때도 있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뭔가 다급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동안은 피아노 연습을 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아기를 돌봤다. 내가 딸랑이를 흔들어주면 아기는 흔들의자에 누워 버둥대며 잘도 놀았다.

누워있는 아기 옆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다 보면 아기는 어느새 새끈 새끈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아기 옆에 가만히 누워 밀려드는 졸음을 참아야 했다. 세상은 적막했고, 골목길 어디선가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몽롱한 상태로 아기 옆에 누워 있노라면 그 순간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피아노가 스스로 뚱땅대며 건반을 연주할 것도 같고, 피아노 위에 널려진 책들이 장단에 맞춰 춤을 출 것도 같았다. 그것이 하농이며 쇼팽이며 체르니, 뭐 그런 이름의 책이라는 걸, 그것이 또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을 때는, 그들이 살아있던 어느 시대로 흘러 들어갈 것도 같았다. 아기와 내가 피아노 앞에 누워 그들의 연주를 지켜보는 상상을 하다 보면 때로 설핏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안 계셨던 순간의 대부분은 졸음을 참고 그저 멍하니 누워있는 시간들이었다. 피아노를 마주한 채로 누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선생님의 피아노 의자 속엔 뭐가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선생님도 저 안에 소중한 물건을 넣어두진 않았을까? 나는 의자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남의 집에 가면 그림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엄마는 늘 당부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림자처럼 가만히 있다보면 선생님이 돌아오셨다. 선생님은 현관문에서부터 나를 부르며 들어섰고 그런 날이면 선생님의 손에 호떡이나 과자 같은 간식이 들려있곤 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환하게 뜬 햇살이 방 안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던 어느 봄날의 풍경이다. 그날도 나는 선생님 댁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옆에 없었다. 내가 ‘나비야’를 세 번쯤 치고 있을 때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아노 위의 창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였다. “세 번 더!” 선생님은 뒤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기는 옆 방에서 자고 있었던가. 대낮의 사위는 고요했고, 솔미미 파레레 도레미파솔솔솔, 하는 피아노 소리만 날개를 단 나비처럼 방안을 날아다녔다. 그날 선생님은 뒤뜰에서 고함을 지르며 레슨을 진행했다. 척, 척, 퍽, 퍽, 물에 젖은 옷이 빨래판에 떨어지는 소리, 빨랫감을 손으로 비비는 소리가 박음질하듯 피아노 반주 사이에 꽂혔다가 다른 계이름 소리에서 풀려나왔다. 나는 좀 나른해졌던가. 잠시 뒤 나타난 선생님은 두 손에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였다. 선생님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가 피아노를 똑바로 치고 있지 않다며 추가로 두 번 더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쭈그리고 앉아 빨래하다 들어온 선생님의 볼은 고무장갑만큼 빨갰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나이는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이었다. 갓 낳은 아기를 돌보고 허다한 집안일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그토록 젊고 그렇게나 악착같았던 선생님은 그 시절 어떤 꿈을 꾸며 살았을까. 선생님의 붉던 볼처럼 선생님은 그 시절을 뜨겁게 살아냈던 것일까.

양손의 손가락을 함께 연주할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다. 툭하면 레슨 안 가겠노라 떼쓰는 나를 두들겨 패다가,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엄마가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는 한강을 건너 이사했다. 레테의 강을 건너온 듯, 나는 다시는 그곳엘 가보지 못했다.

“이건 일본에서 직수입한 피아노예요. 보세요. 영창의 스펠이 다르잖아요.”

피아노 조율사 아저씨가 건반을 누르며 말했다. 아저씨 말에 의하면 영창의 ‘영’자 스펠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과연 피아노에는 브랜드 이름이 young에서 o가 빠진 yung으로 새겨져 있었다.

“요즘엔 중국산이 많아서요. 오래된 피아노가 내구성이 훨씬 좋아요. 글자를 보면 생산연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죠.”

딸아이가 유치원생이 됐을 때, 나는 친정집 방안에 먼지만 가득 쌓여있던 피아노를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이십여 년 만에 피아노를 조율했던 것이었다. 피아노 내부가 너무 멀쩡해서 앞으로도 이십 년은 더 쓸 수 있을 거라고 조율사 아저씨는 말했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던 해까지 그 피아노로 레슨을 받고 연주를 했다. 표면은 낡고 지저분한 피아노였지만 조율사 아저씨 말처럼 조율한 후에는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났다.

피아노를 처분하기로 한 것은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무료할 때면 피아노 앞에 앉아 애니메이션 주제곡이나 대중가요를 연주하던 아이가, 피아노 보기를 돌 보듯 한 지 수 년이 지난 즈음이었다. 뚜껑이 닫힌 피아노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뚜껑은 열리지 않았고 틈새를 파고든 먼지들은 석고처럼 굳어갔다.

피아노는 팔리지 못하고 그냥 처분됐다.

“너무 오래된 피아노라 저희가 살 수는 없고요, 부속품 정도는 쓸 만한 것이 있을테니 공짜로 실어 가져갈 수는 있습니다.”

중고 피아노를 구입한다는 광고를 보고 연락했을 때, 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말했다. 나는 그럼 공짜로 실어 가셔도 된다고 말했다.

운반하는 사람이 두 명 정도는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사람은 중년의 아저씨 한 명뿐이었다. 혼자서 이 무거운 피아노를 어떻게 운반하느냐는 내 질문에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들고 왔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바퀴가 달린 플라스틱 발판이었다. 그는 발을 사용해서 날렵하게 발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중심을 잘 잡은 발판 위에 피아노 몸체의 한쪽을 턱,하니 올리더니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피아노는 썰매를 탄 듯 스르르 방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었다. 피아노는 붙박이장처럼 늘 그곳에 있었다. 옹기종기 와글대던 우리 형제들이 성장해갈 때도, 각자의 둥지를 찾아 집을 떠날 때도, 우리들의 아이들이 피아노 건반을 만지기 시작했을 때도, 피아노는 정물처럼 그곳에 머물렀었다. 나는 피아노의 새까만 몸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녕, 잘 가...”

단지 느낌이었을까, 바로 그때 아저씨의 발판 위에서 피아노가 흔들거렸다. 그리고는 방의 문턱을 넘어서 현관 앞까지 잘 빠져나가던 피아노가 불현듯 멈춰 섰다. “어? 이게 왜 안 빠지지?” 아저씨는 요리조리 플라스틱 발판을 움직였다. 한참을 씨름하던 아저씨는 피아노에서 손을 놓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잠시 후, 한숨 돌린 아저씨가 어영차!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를 냈고, 그제서야 피아노는 육중한 몸을 쑤욱 내밀며 빠져나갔다. 아저씨와 피아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텅 비어버린 헛헛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묘하게 아팠다. 나는 몇 번이고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른이 돼버린 어느 날인가, 나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다섯 건반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묵직했던 ‘도’와 뭉개졌던 ‘솔’도 떠올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시간을 살아낸다는 점에서, 인생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과 매우 닮아 있었다. 누구나 묵직한 소리를 내고 싶지만, 누구나 엄지손가락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뭉개진 소리밖엔 낼 수 없었던 새끼손가락처럼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뭉개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그때의 나는 심장을 바치던 사랑을 잃은 이십 대 후반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다. 나는 무엇이든 될 것 같았지만 되지 못했고, 길거리를 종횡무진했던 시위의 대열에서 일탈 ‘되었다’. 저마다 제 몫의 자리를 찾아갔고 용광로처럼 뒤끓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손가락처럼 나는 인생이라는 건반 위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피아노는 다시 배울 수 있겠지만 지나온 시간을 다시 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정확한 건반을 집어내는 손가락을 갖지는 못할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다섯 개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며 나는 입으로 조용히 계이름을 읊었다. 도가 아닌 도 소리가 레가 아닌 레 소리가, 입 밖으로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마트에 다녀오니 주차장에 있던 피아노가 사라졌다. 이삿짐 트럭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피아노 운반까지 일을 모두 마친 모양이었다. 피아노가 부려있던 자리에는 누런 단풍 몇 장이 계이름처럼 떨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피아노 연주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솔미미 파레레 도레미파 솔솔솔, 나비 한 마리가 귓가에 날아와 앉은 듯, 나는 어쩐지 귓구멍 근처가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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