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십여 년 전이다. 그 아이를 만난 건. 그 아이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었다. 내가 강남의 보습학원에서 학원 강사로 일할 때였다. 나는 아이를 낳고 두 달 정도만 쉬었다. 대출을 많이 받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으니 원리금을 갚아나가려면 갈 길이 멀었다. 부부가 함께 벌면 확실히 돈은 좀 모이게 마련이었다. 신혼 초에는 차곡차곡 대출금을 갚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대로라면 대출 끼고 작은 집 하나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우리는 딩크족(DINK)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아기를 낳을 생각이라면 (나는 충분히 노산이었기 때문에)더 이상 임신을 미룰 수는 없었다. 남편과 나와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의사는 여자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아기를 가질 생각이 있다면 당장 결심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초로의 의사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흥분했고 안타까워했으며, 배란일까지 촘촘히 챙겨주는 미덕(?)을 베푸셨으니, 가히 우리 딸 탄생의 은인은 그분이라 할 수 있겠다.)의 장고(長考) 끝에 우리는 아기를 낳기로 했다. 나는 결국 임신과 출산을 선택하면서 딩크족의 삶을 포기하고 일을 쉬게 되었던 것이다.
아기를 낳고 일을 알아보다가 지인의 소개로 독서와 글쓰기 지도를 시작했다. 중학생을 그룹으로 묶어 글쓰기를 가르쳤다. 그룹마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만 하면 되는 일이니, 수월했다. 그러다가 아기 백일상을 치르자마자 나는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그래야 돈벌이가 될 만했다. 친정엄마에게 백일 지난 아기를 맡기고, 오후 3시~9시까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은 힘들었지만 목표가 명확했으므로 당연히 해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신혼 전에도 나는 학원 강사를 했고 나름 괜찮은 평가를 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내 적성에 맞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이들이 너무 예뻤고 공부하는 재미도 즐거웠다. 학부모와 소통도 좋았으므로, 원장과 동료 강사에게 능력을 인정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아기를 갖게 되면서 그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이었다. 나는 불안했고 초조했다. 예전처럼 유능한 강사의 입지를 굳히려면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야했다. 일단은 작은 학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대형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해봤지만, 거기는 아기를 키우면서 다딜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보수는 상당했지만 그만큼 진을 뺐다. 아무리 돈이 중요해도 나는 아이 엄마였다. 당장은 육아와 강사 일을 병행해야 했으므로, 그래서 선택한 곳이 보습학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울어가는 배에 올라탄 것이었다. 학원은 그러니까 망해가고 있었다. 이미 강의를 시작했고 월급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료 강사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번 달엔 월급이 제때 나올까?”
세상에나,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니! 학원 강사 경력이 오 년쯤 되었는데, 그때까지 월급을 제날짜에 못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았다. 첫 월급은 일주일이나 늦게 지급됐다. 원장은 나를 호출해서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다음 달부터는 월급날을 정확히 맞출 것이니 강의나 열심히 해달라고 당부했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리 하겠다고 했다. 다음 달은 월급날보다 열흘 늦게 돈이 나왔고, 그다음 달은 보름, 그리고 그다음엔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선생들이 하나둘 사표를 쓰기 시작했다. 학원을 그만둔 선생에게, 원장은 밀린 월급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선생들은 월급을 받자마자 학원엘 나오지 않았다. 무단퇴사였다. 원장과 선생들은 악다구니를 지르며 싸웠다. 싸우는 사람 중엔 그만둔 선생도 있었고 그만둘 예정인 선생도 있었다. 선생들은 딱히 하소연할 곳이 없었고, 노동청에 고발한다고 한들 복잡한 과정과 풀리지 않는 해결책만 있다고 했다. 학원이 아수라장이 되고 내 월급이 두 달 반쯤 밀렸을 때, 나도 그곳을 떠났다. 밀린 월급은 결국 받지 못했다.
그즈음에 그 아이의 엄마에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과외 지도를 해달라고.
학원에서 그 아이는 외톨이였다. 친구랑 같이 다니는 걸 본 적이 없고 늘 혼자 앉아 있었다. 학교 성적도 그닥 별로였는데, 시험 기간에 밀착해서 가르치다보니 머리는 꽤 좋은 것 같았다. 처음엔 내게도 낯을 많이 가리더니 친해지니까 질문도 많이 했다. 한 가지를 가르쳐 주면 그건 절대 잊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 전화번호를 공개했는데, 실시간으로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주기 위해서였다. 그 아이도 몇 번인가 문자로 질문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학원을 그만둔 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 존재도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알려줬다는 사실도. 아이는 내가 학원을 그만두자 전화번호를 엄마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그렇게 그 아이와 나의 수업이 시작됐다.
아이의 엄마는 첫 수업 날 만났는데, 놀랄 만한 미인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며 화장까지 전형적인 강남 사모님 분위기가 물씬 났다. 그녀는 아이가 공부를 안 해서 걱정이라며 잘 부탁한다는 짧은 말을 남긴 후, 골프 가방을 들고 서둘러 나갔다. 아이를 가르쳤던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오직 그날 한 번뿐이었다. 수업 중에 가끔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긴 했지만, 얼굴을 보진 못했다. 수업료는 통장으로 입금됐다.
풍부하다 못해 뭐든 넘쳐나는 집이었다. 아이의 아빠는 실업가였는데, 할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사업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형이거나 자기가 물려받게 될 일이라고도 했다. 돈은 넘쳤는데 가족은 없었다. 넘치는 돈에 휩쓸려 가족이 실종된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인가는 입고 갔던 가디건을 두고 온 일이 있었다. 새로 구입한 옷이라 챙겨두라고 아이에게 전화했다. 다음 수업에 갔더니 아이는 ‘유모할머니’를 찾았다. 선생님 옷을 할머니가 챙겨 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옷을 못 찾겠다고 했다. 가디건 같은 건 죄다 드라이를 맡기는데 선생님 옷도 딸려 갔다 온 것 같다고. 오늘 드라이한 옷을 찾아와서 옷장에 걸어놨는데 와서 찾아보겠냐고, 할머니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렵게 어렵게 말했다. 나는 할머니의 안내에 따라 드레스룸엘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가디건 찾기를 포기했다. 옷이 너무 많았다. 비슷하게 생긴 가디건이 옷걸이에 걸리거나 말끔히 개켜져 있었다. 새로 산 지 얼마 안 됐으므로 나조차도 내 가디건이 어떤 것인지 헷갈렸다. 거기 걸린 가디건이 다 내 것 같기도 했고 모두 내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상표 이름도 기억이 안 났다. 가디건만 빨아들이는 블랙홀 속에 잘못 걸려든 것 같았다.
그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도우미 할머니였는데, 아이는 그분을 ‘유모할머니’라고 불렀다. 아이가 갓난아기 때부터 집안일을 봐주셨다고, 엄마보다 더 가깝다고 했다. “엄마보다 가깝다니, 왜? 친할머니도 아니잖아.” “할머니가 나를 키워줬거든요. 엄마는 늘 집에 없었으니까요.” 아이가 말했다.
아이 엄마가 전업주부인 건 분명했다. 그런데 아이 말마따나 늘 집에 없었다. 한 번 여행을 가면 한 달씩 외유를 했고, 집에 돌아와도 골프 연습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이에겐 형이 있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은 중학교 3학년에 유럽 어느 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우리가 수업을 시작했을 때는 형이 유학을 떠난 지 일 년쯤 되던 시기였다. 아이는 엄마가 없는 집에서 주로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공부에 흥미가 있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아이들이 그렇듯 공부란 지루하고 지겨운 극기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엄마의 잔소리나 관심이 없는 집안에서 아이는 혼자, 열심히, 놀았다. 아이는 수업에 반짝 집중하는 듯하다가도 이것저것 잡담을 늘어놓았다.
아이는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형이 엄마 돈을 훔쳐서 선심을 쓰며 친구들의 관심을 사곤 했는데, 어느 날 엄마 방에 들어가 보니 장롱 안에 현금이 자기 키만큼 쌓여 있었다고 했다. 형의 도벽이 들통났을 때는 쌓여 있던 현금의 높이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일로 형은 유학을 떠나게 됐다. 아이는 형이 돈을 훔칠 때마다 너무 무서웠다며 지금도 현금이 다발로 있는 걸 보면 심장이 쿵쿵댄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공불 안 하면 형한테 보내버리겠대요. 그래서 나는 정말이지 유학 가기 싫어요. 형만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나고, 형은 성격이 좆 같아서 툭하면 저를 때리거든요.” 아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태생적으로 소심하고 여린 아이였다. 그건 수업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화를 내거나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 아이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잘못했단 말도 다신 안 그러겠단 말도 없었다. 그저 제 손가락 열 개를 활짝 펴고 다섯 개씩 짝을 지어 손가락 마주치는 행위만 반복했다. 언젠가는 무심결에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까부터 왜 손가락을 가만두지 않는 거야? 무슨 일 있니?” 아이는 버릇이라고 했다. 실은 어릴 적엔 더 심했다고, 혼자 있으면 끊임없이 열 손가락을 맞대게 하고 움직였다고, 손가락을 가만히 두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보다 못한 엄마가 작두까지 사 들고 왔다고 했다.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요. 엄청 큰 작두를 사 왔어요. 그게 무서워서 발작적으로 더 그랬어요.”
아이는 그것 때문에 친구들의 따돌림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중학교 일 학년이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 행동을 멈췄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봤는데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기 모습이 어찌나 멍청해 보였는지,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그래서 그날로 더는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불안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온다고. 선생님이 화내셔서 자기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하며 아이는 웃었다. 아이의 웃음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손가락을 마주치는 동안 아이는 편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눈총을 받게 되자 아이는 그만두려고 노력했을 거였다. 그리고는 더 불안해졌을 것이었다.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아이는 또 손가락을 마주치게 됐을 것이고 그런 자신이 싫어서 더욱 거세게 손가락을 마주치며 떨었을 것이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 문제로 아이 엄마와 이야기를 해볼까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어쩐지 오지랖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혹 용기를 내서 아이 엄마에게 전화해보면, 전화는 해외 로밍으로 연결되었다.
과외 선생이라는 위치는 학생과 가장 밀접하게 만나면서 가장 쉽게 멀어지는 존재였다. 언제고 내쳐질 수 있었고, 그렇게 끝이 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학생은 성적 향상을 위해 선생은 돈을 벌기 위해, 그 이상도 이하도 건드릴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관계임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주 그 경계를 넘었고 학생의 고충이나 외로움이나 때로는 서러움 같은 것에 빠져들었다. 연민을 느꼈고 돕고 싶었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으니까.
아이가 숙제를 잘해온 날엔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랑 ‘플레이스테이션’을 함께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때 좀비란 걸 처음 알게 됐다. 플레이스테이션을 텔레비전에 연결하면, 대문짝만한 벽걸이 티비에서 좀비들이 휘청대며 걸어 나왔다. 하나둘 나타나던 좀비들은 서서히 열에서 이삼십 명씩 늘어났고, 곧이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좀비들이 우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피투성이에 허연 눈깔을 하고 비틀대고 질척대며 그것들이 몰려오면, 나는 비명을 질렀고 아이는 총을 쐈다. 이렇게 총을 쏘면 된다고 아이는 기계 작동법을 알려줬지만, 나는 좀비 앞에서 매번 두뇌가 하얗게 마비돼 버렸다. 내 몫까지 좀비를 소탕해내면 아이는 으쓱대며 한 판만 더 하자고 졸랐다. “선생님은 좀비가 싫어.” 나는 집에 가야 한다고 손사래를 쳤고, 아이는 그럼 인어공주 게임도 있다면서 게임팩을 바꿔 끼웠다.
아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명랑해졌다. 손가락을 마주치는 행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과외 선생이었다. 아이에게 공부를 지도해야 했고 성적을 올려줘야 했다. 아이는 여전히 숙제를 안 해오거나 수업이 길어지면 졸았다. 아이를 달래보기도 하고 윽박질러보기도 하면서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아이의 중학생 시절 마지막 겨울 방학이었다. 유학을 가게 될 것 같으니, 이제 수업을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아이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에게선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가끔 그 아이를 떠올린다. 수없이 마주치던 열 개의 손가락으로 그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외 선생의 치맛자락을 붙잡던 외로움은 아이 곁에서 사라졌을까. 온종일 게임을 하고 또 해도 시간은 둥지를 틀고 멈춰선 집안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도 아빠도 형아도 없는 곳에서, 아이는 너무 외롭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는 어른이 돼버린 아이가 조금 덜 외롭기를, 좀비를 해치우고 승리의 파이널을 장식했던 그 유쾌함으로 살아내기를, 나는 바라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