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식 변소, 그 찬란한 기억.

by 변희영

나는 청량리에서 아홉 살이 되던 해까지 살았다. 그곳에서 입학한 초등학교는 여덟 살 아이의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손목시계가 없었던 시절이니 몇 분이나 걸어야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학교에 가려면, (유년 시절에는) 엄마가 근처에도 가지 말라 했던 큰길을 건너야만 했다. 그건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 학교를 다닌다는 건 큰길을 당당히 건널 수 있다는 거였고, 금기를 깰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장했단 얘기였으니 말이다.


학교는 큰길을 건넌 후에도 육교를 넘어가서 한참이나 걸어가야 나오는 곳에 있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동네 친구와 손을 꼭 잡고 갔지만, 학교에 도착할 때면 내 손에 쥐고 있는 건 신발주머니뿐이었다. 친구와 손을 잡고 걷다 보면 손바닥에 땀이 생겼고, 누구 하나는 뒤로 쳐지기 일쑤였으므로 친구의 손 같은 건 내버린 지 오래였다. 여덟 살 아이가 걷기에는 꽤 먼 길이었고 시간은 늘 촉박했다. 잰 걸음을 놀려 학교에 도착하면 나는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곤 했다.


학교는 초등학교 건물 치고는 크고 웅장했다. 학교 안에는 식당도 있었는데 하굣길에 사 먹는 짜장면 맛이 끝내줬다. 엄마를 졸라 동전 몇 개를 주머니에 넣어온 날이면 짜장면을 사 먹을 기대만으로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통학길이 멀긴 했지만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가는 재미란, 학교에 간 언니 오빠를 기다리는 지루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운이 좋은 날은 학교에서 언니를 만나기도 했다. 집에서 한나절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언니를 학교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니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학교에서 만나는 나를 반가워하기는커녕 귀찮아하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엄마는 동생을 챙기라고 언니에게 늘 당부했으므로, 언니는 들러붙는 나를 떼어놓지는 않았다. 오학년이었던 언니는 오 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고 월말고사에선 우등상을 받는 모범생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언니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를 데리고 언니 교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언니는 우리를 차갑게 대했고 얼른 너네 교실로 가라고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어쩌다 함께 집에 가는 날이면 나는 재빨리 걷는 언니의 뒤꽁무니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 가야 했다. 언니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래도 나는 언니와 함께 집에 가는 게 좋았다.


그러나 언니는 고학년이었고 토요일을 빼면 하교 시간도 달랐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학교에서 오줌이 마려워도 변소에 같이 가달라고 언니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변소 행은 친구와 함께였다. 변소에 혼자 들어가는 것은 끔찍하게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변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둘이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볼일을 보는 것은 자력갱생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변기를 찾아 각자의 볼일을 해결해야했다.


초등학교의 화장실은 학교의 규모만큼이나 거대했다. 화장실 건물은 아예 따로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 앞에는 ‘변소’라고 씌어 있는 나무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화살표 모양의 그 팻말 앞에 이르면 어느새 악취가 코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터널 같은 변소 건물은 크고 어둡고,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더러웠다. 아직도 그 건물을 떠올리면 지린내와 똥내가 버무러진 악취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한쪽 손으론 입을 막고 다른 한쪽 손으로 코를 움켜쥔 후에야 나는 간신히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짜장면을 먹는다거나 친구와 운동장에서 놀다보면 시간은 후욱, 지나갔다. 집에 가야 할 길이 꽤 멀었으므로, 오줌을 지리지 않으려면 변소에 들러야 했다. 변소의 기다란 복도 양쪽에는 수많은 문짝이 달려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수명을 다 했거나 수명을 다 해가는 중이어서, 지지직 소리를 내며 발작하듯 명멸했다. 행여 건물 안쪽으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문짝들은 삐그덕 삐그덕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변소에 들어섰으니 문짝을 열고 들어가 볼일을 봐 야 하는데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변기 근처에 오물이 없는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변기는 밑이 뻥 뚫린 재래식이었고 그곳은 바닥이 어딘지 모를 만큼 깊었다. 아니 실은 어둑한 건물에서 변기의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오물이 그득 차서 안 보였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내 눈이 그곳을 회피했다.

나는 변소 안에 들어선 후에도 쉽게 볼일을 보지 못했다. 볼일을 보려면 발을 디딜 곳에 오물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오물이 묻어 있지 않은 변기를 찾아내는 것은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탐험자의 길처럼 더디고 힘들었다. 길다랗게 늘어선 문짝을 하나하나 열어볼 때마다 나는 죽을 만큼 아득했다. 그나마 발을 디딜 곳을 찾아내고 두 다리를 굳게 버티며 오줌을 싸려고 쭈그리면, 공포에 찌든 오줌은 졸졸졸 마른 물줄기처럼 떨어졌다.


꼭 갈 수밖에 없으니 꾹 참고 다녔던 변소를 그나마도 출입하지 않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이 생긴 이후 학교를 떠날 때까지, 나는 다시는 변소엘 가지 않았다. 아니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이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학생은 나와 같이 입학한 일학년이었다. 아이는 변소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아침 바람이 아직 차갑던 어느 월요일, 전교생 조회 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늘어선 학생들을 향해 교장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들의 어린 동생과 친구였던 학생을 위해, 묵념합시다. 시작!”

나는 전교생이 일제히 묵념을 하며 고개를 숙이던, 그러니까 그들의 뒤통수가 앞을 향해 끄덕하며 떨어지던 모습을 목격했다. 그 순간 그들 모두가 변소에 추락하는 상상을 하고 말았고, 발밑에 똥덩이가 출렁대는 변소에 서 있는 듯 나는 그만 아찔했다. 코끝에서 분뇨의 찌린내와 구린내가 꾸물꾸물 올라오는 듯 역겨웠다. 똥구덩이에 빠져 비명을 질렀을 아이, 몸부림칠 때마다 늪지대에 빠진 것처럼 그악스럽게 끌어내렸을 똥구덩이의 억센 힘, 아이의 눈과 귀와 입과 콧구멍까지, 모든 구멍에 꽉꽉 들어찼을 오물을 떠올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구역질하며 침을 뱉었다. 그날 이후 학교에선 물도 마시지 않았고, 당연히 짜장면도 사 먹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 음습한 변소에 발조차 디디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학년이 시작되자마자 그 학교를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들었던 청량리의 이층집을 떠나 한강 남쪽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다. 전학생의 신분으로 등교한 학교는 청량리의 학교보다 작고 아담했다. 웬만한 양옥집 마당 두어 개를 합친 크기의 운동장은 어린 내 눈에도 작아 보였지만 나는 그 학교가 맘에 들었다. 바로 화장실 때문이었다. 그 학교엔 층층마다 화장실(변소가 아닌)이 있었다. 문 앞에는 화장실이라 인쇄된 말끔한 팻말도 달려 있었다. 구역질 나는 악취도 나지 않았고, (우리가 ‘스팀’이라고 불렀던) 난방 장치(라지에이터) 덕에 화장실은 후끈거릴 만큼 따뜻했다. 나는 신이 나서 칸칸이 있는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재래식 변기가 아니었다. 말끔한 흰색 도기가 번쩍이는 화변기였다. 내가 얼마나 안심했고 또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깨끗한 화장실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청량리 학교에서 소변을 참곤 했던 까닭에 방광염을 앓고 있던 탓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떤 까닭인지 수업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엘 가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오줌이 마려웠다. 교실 청소를 끝내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릴 때 살짝 다리를 꼬며 요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생님의 지청구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날 나는 가방을 메고 만화책을 읽으며 교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화장실을 들렀다가 집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걸어가면서 만화를 보면 위험하고 눈도 나빠진다며 당장 책을 가방에 집어넣으라는 것이었다. 전학생 신분이었으므로 선생님께 지적당한 것이 부끄러웠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선생님께 인사한 후 발길을 재촉했는데, 교문을 나서자마자 강렬한 요의가 느껴졌다. 교문에서 집까지 가려면 육교를 한 번 건너고 직진, 대략 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조금만 참으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교를 다 올라서기도 전에 다리의 기운이 빠져버렸다. 발걸음을 재촉하긴 했지만 한껏 팽창한 방광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티며 걸었다. 서서히 다리의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먼저 나간 앞다리의 힘으로 뒷다리가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드디어 고지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열 발자국만 걸으면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 집은 이층이었으니 다 온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너무 빠른 안도감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시원하게 오줌을 해결하는 장면을 상상했던가. 나는 그만 꽉 눌러왔던 오줌보의 긴장을 풀어 버렸고 멈춰 선 채로 오줌을 싸고 말았다. 허벅지가 뜨끈하다 싶더니 가랑이 사이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메말랐던 아스팔트는 두 발 근처에서 둥글게 젖어 들었다. 오래 참았던 만큼 오줌 줄기는 길게, 한참을 흘러내렸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한참이나 오줌을 흘리고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행여 학교 친구들이 볼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눈알을 굴려대며 주위를 살피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다.

어느새 오줌보가 느슨해진다 싶었고 그제서야 나는 엉거주춤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마를 입고 있었고 상당량의 오줌은 스타킹 안쪽으로 흡수된 상태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구두와 발등엔 오줌이 튀어서 누릿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젖은 스타킹은 허벅지에 달라붙어 축축했다.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기며, 나는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 시절 시작된 방광염의 여파는 질기고도 강력했다. 성인이 돼서도 면역이 떨어지면 방광염이 찾아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대한 끔찍한 트라우마였다. 나는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에 털퍼덕 주저앉아 있는 꿈을 꾼다. 사실 주섬주섬 똥을 주워 먹는 꿈도 많이 꿨다. 그리고 꿈의 배경엔 늘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눈을 뜨고 나서도 입안에 텁텁한 맛이 한참이나 남아있을 정도로 생생했다.

똥 먹는 꿈을 꾸면 로또를 사야 한다고 주변에서 하도 조언을 많이 하길래, 딱 한 번 로또를 사본 적도 있다. 물론 꽝이었다. 돈을 많이 벌거나 대박날 꿈이라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단 한 번도 똥 꿈의 위력을 맛본 적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재래식 화장실이 무섭다. 더럽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무섭다. 한 아이가 빠져 죽었던 그곳, 내가 발을 디디고 서서 내려봤던 그 어둡고 깊고 웅숭깊은 곳에서,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 거다. 나는 고속도로 간이 화장실이나 사찰의 해우소를 이용하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사십여 년간 극복 못 한 트라우마를 앞으로 떨쳐내긴 어려울 듯 싶다. 나이를 먹을수록 방광의 상태는 더 안 좋아지고, 요의를 참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니 마지막 선택은 결국 기저귀뿐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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