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은 상가건물 3층에 있었다. 일 층엔 고깃집이, 이 층엔 잡화점이 들어서 있는 건물이었다. 고깃집은 장사가 그다지 시원찮았는데 곧 닥쳤던 외환위기 탓으로 나중엔 파리만 날렸다. 고깃집 주인은 늘 화난 표정이었고 장사를 하는 것보다 담배를 태우는 시간이 더 많은 사십대 남자였다. 그는 간혹 주차 문제로 고함을 지르거나 배달 온 식자재를 옮기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남편과 나는 몇 번인가 그곳에서 고기를 사 먹었는데, 그는 계산대에만 죽치고 앉았다가 손님이 계산할 때만 히죽히죽 웃었다.
어느 날인가 식탁 위에서 잽싸게 도망가는 바퀴벌레를 목격한 후, 나는 다시는 그 집엘 가지 않았다. 등짝이 번들번들하고 두툼하고 커다란 바퀴벌레였다. 고깃집 주인의 이마와 콧등의 개기름은 유난히 번들거렸으므로, 식당 앞에서 흡연 중인 그를 만날 때마다 바퀴벌레의 등짝을 떠올리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테이블 위에서 식당 바닥까지 순식간에 오르내리던 바퀴벌레가 운 나쁘게 돼지갈비의 간장 양념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있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바퀴와 주인의 연관성을 떠올리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 집 고기를 씹는 것은 내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잡화점은 건물 주인의 딸이 운영하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의 주방 소품이거나 등긁개 따위의 자잘한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 장사가 잘 되지 않기는 고깃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이 없어 무료한 그녀에게 나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던 그녀는 수다를 위해 살고 수다를 떨다 죽을 것처럼 수다에 목맨 사람이었다. 그녀를 피하고 싶었지만, 우리 집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이층을 지나야 했으므로, 그녀를 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자주 그녀의 손에 이끌려 매장 안으로 들어갔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 떠는 일에 동참해야 했다. 그녀에겐 아직 어린 딸이 둘 있었는데 그녀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만삭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그녀는 뱃속의 셋째가 아들이라고 말해줬다. 병원에서 알려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만약에 셋째도 딸이었으면 처분했을 거라고 말했다. ‘처분’이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당신이나 나나 딸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나는 좀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는 내가 흥분하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아이를 낳았는데 만약 딸이라면, 자기 모르게 처분해 달라’며 미리 부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마에 내 천자를 만들며, 왜냐면 딸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딸을 둘이나 키워봤냐고, 키워보면 알 거라고 했다. 아침마다 머리를 따주거나 핀을 꽂아주거나 예쁜 옷을 사입히는 일은 자기의 취향과 너무도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취향이라니, 자식을 취향으로 키운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오! 나는 따지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자기는 원래부터 아들을 낳고 싶었다고 했다. 딸 둘을 먼저 낳고 보니 셋째를 가져야겠다는 욕망이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비법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아들 낳는데 효험있다는 불상을 찾아가 그것의 배때기를 문지른다거나, 남편이 발가락에 힘을 주도록 주문한다거나, 배란 날을 잘 맞춘다거나 하는, 다양한 비법이 총동원됐다. 다행히도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아들이라는 최종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나에게도 그 비법을 알려주겠노라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므로 머리가 아프단 핑계를 대고 집으로 올라왔다. 내가 그 신혼집을 떠나온 다양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녀의 수다와 아들 편애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주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들 기저귀 갈다가 고추를 보면 말이야,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가끔 고 녀석이 갑자기 내 얼굴에 오줌을 갈길 때가 있거든. 근데 하나도 더럽질 않아. 오히려 어찌나 행복한지 말이야, 새댁도 아들을 낳아봐야 알텐데, 호호호.”
그래도 한때 여성해방이니, 페미니즘이니 운운했던 내 눈에 그녀가 정상으로 보였을 리가 없었다. 이건 뭐, 마조히스트가 울고 갈 도착 증세 아니야? 아마도 나는 그렇게 중얼댔던 것 같다.
삼층엔 두 집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북향이었다. 신혼집을 구할 때 나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던지라 그 집이 북향인지도 몰랐다. 살다 보니 북향이었다. 친정엄마는 처음 그 집에 와보고 다시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 내가 널 이런 집에 살라고 키웠냐는 말만 했다. 서른 살, 늦은 결혼이었으면서 나는 그런 걸 전혀 몰랐다. 아홉 살부터 아파트에서만 살아봤으니 집이란 다 아파트 같은 건 줄만 알았다. 보일러도 조작할 줄 몰랐다. 보일러에 기름을 채우는 건 말로만 들어봤던 일이었다. 기름을 채우다니, 그거 참 난해할 일이겠네. 생각만 했다. 그래서 보일러가 얼어붙었던 어느 날, 나는 남편과 크게 다투었다. 대체 왜 보일러를 얼도록 놔두었는지 화가 났다. 남편이 뜨거운 물을 부어봤지만 보일러는 녹지 않았고, 임신중이던 나는 얼음장 같은 방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야 했다. 우리는 고함을 지르며 싸웠고 서로의 부족함을 원망했다. 남편은 무능해 보였다. 나와 아이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뱃속의 아이가 불쌍하고 내 신세가 처량했으므로 나는 기를 쓰며 울었다.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차에 시동을 걸었고 난폭 운전을 했으며, 나를 친정집 앞에 내려주고 혼자 돌아갔다. 그날 나는 결혼 전의 내 방에서 보드랍고 따뜻한 기운에 싸여 잠이 들었다. 다시는 그 차갑고 어두운 신혼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남편은 새벽까지 뜨거운 물을 부어대며 보일러를 녹였다고 했다. 내가 따스한 침대에서 잠에 빠져 있는 동안, 남편은 돌덩이 같은 냉골 바닥에서 간신히 쪽잠을 잤다는 것이었다 비록 임신 중이긴 했지만, 남편만 추위에 떨어야 했다는 건 어쩐지 불합리해 보였다. 이틀 뒤에 남편은 보일러를 교체했다며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나는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북향이었던 집에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햇빛은 뒷베란다에서 잠시 기척만 냈다가 숨바꼭질하듯 사라져 버렸다. 내가 햇빛을 그렇게 좋아했었단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소중한 걸 알아차리는 데 결핍만한 것은 없었다. 햇빛이 없으니 그리웠다. 아니 햇빛이 그리워서 애가 탈 지경이었다. 사실 그 집은 구조도 묘했다. 화장실 내부가 길다란 직사각형이었다. 화장실 문과 샤워기가 달린 벽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 둘이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원래의 용도와는 달리 급하게 살림집으로 개조한 탓인 듯 했다. 게다가 그 동네는 공장지대였다. 아침이면 쇠를 가는 기계음에 눈을 떴다. 머리털이 쭈삣 설만큼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안방의 창틀에는, 내가 사다둔 작고 앙증맞은 팬지꽃 화분 몇 개가 있었는데, 꽃잎 위로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쇳가루가 쌓였다. 햇빛이 들지 않기 때문인지 쇳가루 탓 때문인지 꽃은 시들시들 말라갔다.
하루는 환기도 할겸 모기창까지 활짝 열고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런데 꽃잎 위의 쇳가루를 닦다가 그만 화분을 잘못 건드렸다. 화분은 순식간에 중력에 순응하며 떨어졌고 길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었지만 사람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을까, 가슴이 서늘했다. 그 후로 나는 창문 여는 게 무서웠다. 창문을 열면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화분이 떨어졌던 길바닥을 보는 건 살인 현장을 목격하는 것처럼 께름칙했다. 창문을 꼭꼭 닫으니 쇳가루는 쌓이지 않았지만, 가슴에는 닦아낼 수 없는 우울이 쌓였다.
나는 사랑을 선택했지 가난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결혼 생활이 가난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난을 끌어안을 생각은 없었다. 내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게다가 혼자 가는 길이 아니었다. 함께라면 가난 따위 두렵지도 않았고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산이었단 건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난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가난은 낭만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우리가 겪게될 가난을 어깨에 묻은 먼지쯤으로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손으로 툭툭 털어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가벼운 먼지의 무게 말이다. 그러나 가난은 털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빨판을 가진 생물처럼 그악스럽게 들러붙어 내게 있는 무구(無垢)한 것들을 제 위장 안으로 씹어 삼켰다. 일테면 사랑이나 연민 같은, 그리고 끝내 지키고 싶은 품위나 자존심마저도 빨아들였다. 낭만은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순결했고 현실에서 그것은, 심지어 위해했다. 산산조각난 것은 화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젖내 나는 나의 유치한 낭만이었다.
사 층에는 주인집 아들 내외와 그의 아이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는 검정 세단을 몰고 다녔다. 세 대의 차가 주차할 수 있게 구획된 주차장엔, 늘 두 대의 차량만 주차돼 있었다. 주차장의 절반은 그 검정 세단의 차지였다. 주인집 아들에게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 세단은 시도 때도 없이 주차장에 부려진 채였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주차장에 주차할 수 없었다. 차를 몰고 다닌 사람은 주로 나였기 때문에 나는 늘 주차를 걱정했다. 오늘은 제발 주차할 수 있기를, 동네를 빙빙 돌며 빈 공간을 찾아 탐험하지 않기를, 절절한 소망을 빌며 주차장에 도착하면, 주차선을 가볍게 넘어온 세단의 위용 앞에 나는 좌절했다. 가로등에 반사된 세단은 유독 반짝였고, 초라한 뒷골목을 접수한 보스처럼 위풍당당했다. 전화하거나 항의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차체의 일부분을 잘라낼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같은 삼층에 거주하던 여자 말에 의하면, 자기 남편이 저 세단 때문에 몇 번 항의해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온 대답이 ‘곧 차를 바꿀 거’라는 거였다. 더군다나 주인집 아들을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도 했다. “나중엔 우리 아저씨가 주인한테 전화했거든요. 너무 열받아서 못 살겠다면서요. 우리 차도 RV차량이라 가뜩이나 주차 박스가 좁았는데, 그나마도 이용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근데 주인이 그러더래요. 아들이 차를 곧 바꾼다고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요. 그게 벌써 이 년이 넘었어요.”
나는 사 층집에 항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싸운다고 항의한다고 또는 부탁한다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공권력이 접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허긴, 공권력이 내 편을 들어줄 리도 만무했다.
나는 퇴근이 늦었으므로 밤마다 주차장을 찾아 떠돌았다. 언젠가는 동네를 세 바퀴쯤 돌다가 근처 공장 옆에 주차했다. 전화번호를 적어 둔 메모판이, 대시보드 위에 엎어져 있었단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원래는 공장문이 열리기 전 이른 아침에 차를 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던 것이었다. 헐레벌떡 뛰어 도착했지만 공장은 이미 가동을 시작한 후였다. 한여름의 아침은 일찍부터 한증막이었다. 땀을 뚝뚝 흘리며 기계를 만지던 직원은 나를 보자마자 도끼눈을 치켜떴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다 마칠 수도 없었다. 당장 차를 빼지 않으면 그가 진짜 도끼를 들고 나올지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 차의 꼴이 가관이었다. 차의 표면에는 노란 페인트가 수도 없이 찍혀있었다. 페인트는 손톱만한 크기도 있었지만 쟁반만한 무늬도 있었다. 아마도 그 공장은 페인트 작업을 하는 곳인 듯했다. 나는 항의할 엄두도 못 냈다. 차를 그곳에 세운 건 나였으니까. 그러나 뭔가 많이 억울한 건 사실이었다. 얼룩덜룩한 차를 몰고 다닐 수는 없었다. 도색공장에 차를 맡겼다. 차를 맡기고 나오다 문득 돌아보니 얼룩덜룩한 자동차의 꼬라지가 내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처량하고 초라했다. 이게 내가 바라던 결혼 생활인가, 허공에 허탈한 한숨을 뱉어내며 나는 힘에 겨웠다.
도색한 차는 말끔해졌지만, 자동차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주차할 곳은 여전히 부족했고 나는 밤마다 막막했다. 때로 술꾼들은 화풀이 대상으로 주차된 차를 흠씬 두들겼다. 가난한 동네엔 감시카메라도 없었다. 주차했던 차의 백미러가 두 번쯤 박살이 났을 때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출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즈음이었다.
우리는 강남의 19평 아파트를 전세 계약했다. 친정엄마에게 돈을 조금 빌렸고 은행 대출을 추가로 받았다. 신혼집 전세 대출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맞벌이하던 일 년 반 동안 대출 원리금의 삼십 프로는 갚을 수 있었다. 이사 갈 아파트는 정남향이라고 했다. 아침이면 기계 소음이 아니라 환한 햇살이 귀를 파고들 거라고, 나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삿날, 남편은 이삿짐센터를 계약하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을 불렀다. 골목은 사다리차가 서 있기에 너무 좁았다. 어쩔 수 없이 상가 입구 쪽에 사다리차를 설치했다. 고깃집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다 말고 벌컥 짜증을 냈다. 식자재 차가 들어와야 하는데 길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아저씨 얼굴은 붉은 고구마처럼 타들어 갔는데, 나중에 보니 얼굴에는 번들번들 개기름까지 흥건해서 나는 그만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토록 눈이 부신 얼굴로 아저씨는 죽어라고 담배를 피웠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추임새처럼 욕을 뱉었다.
부동산에서 만난 집주인은 자기 집에 살다가 (아파트로)잘 돼서 나가게 됐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면서, 이게 다 자기 집터가 좋은 덕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전세금에서 복비를 뺀 잔금을 돌려주었다. 계약 기간(2년)에서 한 달 일찍 이사를 나가는 것이니, 복비는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자비랄지 이해랄지 그런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고 싶을 땐 돌아설 수 있는 것만으로 운이 좋은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남편의 친구들은 호기롭게 냉장고를 들고 장롱을 옮겼지만, 냉장고는 자꾸 미끄러졌고 장롱은 군데군데마다 모서리에 걸렸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완전히 지친 듯했다. 남편 말로는 친구끼리 원래 그랬다고, 이삿날 함께 모여서 돕고 그랬다고, 친구니까 그랬다고, 자기도 그랬다고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가 이삿짐 직원이 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숙련된 사람도 힘든 이삿짐 나르기를, 서른의 남자들이 해내려니 아슬아슬하기가 외줄 타기와 다르지 않았다. 신혼살림이니까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사들였던 장롱이며 화장대는 찍히고 긁혀서 엉망이 됐고 그 일로 우리는 또 크게 다퉜다. 이사가 끝난 후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단단히 마음이 뒤틀려버린 것이었다. 신혼 가구에는 긁히고 갈라지고 떨어져 나간 생채기들이 문신처럼 남았다. 그 모든 게 남편 탓인 것 같았다. 우리의 남은 생은 망가진 가구들처럼 모질고 고단할 게 틀림없어 보였다. 서로를 원망하고 공격하고 기어코는 나를 연민하다 끝을 내겠지. 나는 절망과 좌절을 벗어날 기운이 없었다.
며칠 동안 날은 흐렸고 간헐적으로 비가 내렸다. 아이를 돌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다 못한 동생이 부엌살림을 정리해 주고 가며 말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 일단 정리하고 생각해 봐야지. 이사를 왔잖아.” 그제서야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랬다. 나는 이사를 왔다. 골을 흔들어대던 쇳소리에서 어둑하던 집안에서 주차장을 찾아 맴돌던 불안에서 떠나왔다. 그러고 보니 열어둔 창문 밖이 조용했다. 쇳소리도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15층 복도에서 내려다본 아파트 주차장은 아찔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니 거실 바닥에 카펫처럼 깔려있던 햇살이 그제서야 내게 알은체를 했다. 나는 비로소 허기를 느꼈다. 허겁지겁 쌀통을 열어 밥을 지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어쩌면 노랫소리가, 아니 어쩌면 아무 소리도 아닌 소리가 들렸다. 쇳소리만 아니면 다 괜찮아. 나는 중얼거렸다.
그 후로도 나는 대여섯 번의 이사를 했다. 여전히 내 집을 구하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나는 얼마나 더 이사를 다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살던 집을 떠날 때마다 몸서리치며 벗어났고 새로운 둥지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을 꿈을 꿨다. 언젠간 내 집을 갖게 될 거라고, 그때는 중세시대 궁궐처럼 안방을 치장하고 도서관 같은 거실을 만들겠다고 했다가, 방 한 칸에 널찍한 서재를 꾸며 여자만의 방을 만들겠다고 했다가, 아일랜드 식탁을 가운데 두고 남편은 고기를 굽고 아이는 샐러드를 만들고 나는 와인을 따겠다고 했다가, 다시는 꿈 같은 건 꾸지 않겠다고 했다가, 수 없이 좌절하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때로는 맘껏 부풀어진 꿈이 슬퍼질까봐, 바늘로 쿡쿡 찔러 터뜨려가며 불안을 견디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갓난아이는 어른이 됐고 나는 중년의 나이를 먹었다. 간절했던 소망은 슬몃슬몃 눈치를 보며 제 몸을 숨겼지만, 엄혹한 현실의 시간은 도도히 흘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전세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 한 채 가지지 못한 것이 내 무릎을 꿇게 하진 않았다. 돌이켜보면 꾸역꾸역 삶을 버텼지만, 나는 늘 당당했다. 그 시절 우리가 이사갔던 첫 아파트에서 우리는 육 년이나 살았다. 집은 좁았고 짐은 늘었다. 남편과 싸움이라도 한 날이면,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서 좁은 집을 부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에선 이슬 적신 풀 냄새가 났고 창가에 비친 저녁의 일몰은 찬란했으므로, 나는 슬퍼만 하지 않았다.
아직도 가야 할 곳이 있다면 나는 또 짐을 쌀 것이고 다시 짐을 부리며 꿈을 그려 넣을 것이다. 이제는 화려한 미래보다 수수하게 늙어가는 삶의 꿈을 꿀 터이지만, 그래서 때로 시리고 막막하겠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것일 거다. 품은 것을 내려놓는 것, 이루려하기보다 머무르는 것 그래서 편안해지는 것 말이다. 잘 될지 모르겠으나 그것도 그저 내려놓아야지. 잔뜩 굳어버린 어깨를 주무르며 오늘도 나는 마법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