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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미 Nov 11. 2019

아파트는 몸에 해롭다

아파트는 몸에 해롭다     


내가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다. 이웃 동네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엄마는 낡은 집을 팔고 그리로 이사 가자고 아빠를 졸랐다. 안동 양반임을 자부했던 아빠는 웬만해선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그 무렵엔 엄마와 눈만 마주치면 고함부터 버럭 질러 엄마의 심장을 졸여놓곤 했다.      


“마당이 있고 비둘기도 날아오고 연못에 물고기도 헤엄치는 이 집이 얼마나 좋은데 이사를 가!”      

엄마는 비둘기 똥 때문에 살 수가 없고 한두 마리 꼴같잖던 물고기는 작년 겨울에 벌써 얼어 죽었다고 했지만 아빠는 요지부동이었다. 물고기는 다시 사다가 넣으면 되고 비둘기 똥은 앞으로 막내보고 치우라고 시키겠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나는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에 무조건 찬성하고 나섰다. 


“그렇게 좋은 비둘기 똥은 아빠나 치우라지!!” 이러면서.     


엄마는 말이 안 통하자 머리를 싸매고 누워 버렸다. 공부하느라 바쁜 첫째. 둘째. 그리고 사춘기 문턱쯤인 셋째가 비워둔 빈자리에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내가 엄마 역할을 대신해야 할 판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아빠는 배가 고팠고 고픈 배를 채워 줄 엄마는 드러누워 꼼짝 안했다. 양반 체면에 부엌에서 냉장고나 뒤지고 있을 수 없던 아빠는 나보고 대충 뭐라도 좀 차려보라고 했고 착한 막내딸은 냉장고에 있던 굴비 한 마리를 곰탕 끓이는 큰 솥에 넣고 물을 가득 채운 뒤 고춧가루만 풀어 매운탕을 끓여냈다. 뼈와 살이 녹아버린 허여멀건 굴비탕을 훠어이 훠어이 몇 번 저어 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은 아빠는 먹고 사는 게 더 다급해서 어쩔 수 없이 마당 있는 집을 팔았다.    

 


그렇게 우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엄마는 더 이상 똥차를 불러 화장실을 퍼내지 않아도 되고 외풍으로 시렸던 온몸이 노곤노곤 해지는 난방시설에 만족해했다. 마당에 널려있던 비둘기 똥도, 여름이면 모기들 때문에 시멘트를 들이 부어 메워버리려고 했던 작은 연못으로 부터도 해방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아파트가 갑갑해져 갔다. 대문만 열고 나가면 동네 친구들 서너 명쯤 언제나 길에 널려있었는데 이곳 아파트 아이들은 왠지 새초롬한 게 말 걸기도 어려웠다. 전에 살던 동네에선 골목을 벗어나면 바로 재래시장이 있어서 어디를 가도 구경거리가 넘쳐났지만 여긴 조금만 시끄럽게 해도 바로 인터폰이 울렸다.      


“엄마. 다시 예전 동네로 이사 가면 안 되나?”

“거길 왜 다시 가? 지겨버 죽겠는데.”

“이 동네는 재미도 읎고 애들도 쌀쌀맞다. 집에서 뒤꿈치 들고 걷는 거도 짜증나고.”

“처음이라 그러지 좀만 있으면 다 적응된다. 요 아래 3층에 사는 희진이라는 애가 예쁘더만. 니 보다 한 살인가 많던데 엄마가 니 데꼬 놀으라고 내일 얘기 하께.”     


엄마는 내 불평이 아빠 귀에 들어갈까 봐 다음 날 바로 약속을 실천으로 옮겼다. 희진언니의 엄마는 내가 본 최고의 미녀 아줌마였으며 교양과 분위기로 우리를 압도했다.      


“희진아, 앞으로 니가 잘 데리고 놀아줘. 이사 와서 아는 친구도 없다는데 알았지?”     


서울 말씨였다. 엄마 말로는 작년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아빠 직장 때문에 부산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어쩐지 세련됐다 했네. 그 언니는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무렵. 좀 산다 하는 집 자식들은 그랬다. 아침마다 교복을 곱게 차려입은 희진언니는 마치 미스코리아가 무대에 오르듯 스쿨버스에 사뿐히 올라타고 사라졌다.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으로 가끔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바쁠 게 뭐 있겠냐만은 그래도 한번쯤은 고 예쁜 목소리로 “지금 놀러올 수 있니?”라고 물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말이다. 언니는 늘 한결같았다.      


“지금 내려와.”     


가보면 동네 아이들 서너 명이 벌써 자리를 잡고 스칼렛 오하라의 흑인 유모마냥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웃긴 건 수족들 중에는 남자도 두어 명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거기엔 우리 반 남학생도 끼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기억이 뿌였긴 한데 희진언니와 우리 반 남학생이었던, 이름은 잘 생각 안 나지만 아무튼 잘생겨서 언니가 애정 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희진 언니가 남자 아이 귀에다 대고 킥킥거리며 뭔가 얘기를 했고 그 친구도 킥킥 거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방 창문에 커튼을 쳤다.      


“너 우리랑 놀고 싶으면 옷 벗어봐. 그럼 놀아줄게.”     


처음엔 잘못 들었거나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말 한 마디에 수족처럼 움직여주는 동네 아이들이 그 언니에겐 장난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싫증나면 버리고 심심하면 새로운 것을 사면되는. 어린 나이였고 어찌할 바를 볼라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그 집 아빠가 마침 퇴근하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라면 환장을 하고 좋아하던 희진언니는 더 이상 이런 장난은 재미가 없어졌다는 듯 툭 하고 한 마디 던졌다.      

“니들 이제 가. 아빠하고 놀 거야.”     


그 이후의 기억은 사실 잘 나지 않는다. 희진 언니하고 계속 놀았는지 어쨌는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았으니 안보고 지내진 않았을 테고 아는 체 정도는 하고 살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 시절 아파트는 내 몸에 해로웠다. 비둘기 똥을 치우며 사는 게 훨씬 나을 뻔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쭈욱 지금까지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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