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 4] 용과 사무라이의 대전 전말
#. 아래 내용은 2025년 8월에 출간된 '전쟁의 역사' 주요 부분.
"오늘 저녁 적 항공기들이 다시 충칭을 폭격했다. 도시는 여전히 불타고 있다. 내가 살면서 보았던 가장 참혹한 모습이다. 끔찍한 광경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신이 있다면 왜 우리의 적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는 것인가...(중략)... 일본군은 백주 대낮에 도착하자마자 돈을 빼앗고 강간했다.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검에 찔려 죽었고, 심지어 안전구역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역 밖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피살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청년들이었다." -중일 전쟁 증언 中
... 장제스가 시안에서 납치 구금됐다. 해당 지역 군벌인 장쉐량이 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였다. 그의 행위엔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장제스가 일본의 위협은 등한시하고 같은 중국인들(공산당)과 싸우는 데에만 집중한다며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또 다른 동기는 장제스가 본인을 쫓아낼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잠시동안 장제스의 운명이 불투명해 보였다. 소련을 비롯한 주요 열강들과 중국 국민들은 장제스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직시했다. 이러한 시각은 장쉐량 등도 공유하고 있었다. 조만간 석방 협상이 열렸다. 장제스는 항일통일전선을 굳건히 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 풀려났다. 중국 전역에서 대원수 장제스의 석방을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만큼 이 시기에 장제스는 명실상부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이후 중국은 급속도로 대일 강경 노선으로 나아갔다. 일본에서도 강경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7년 6월 비교적 온건파였던 하야시 내각이 물러났고, 새로이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들어섰다.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히로타 고키는 대표적인 대중 강경파였다. 이로써 중국과 일본의 무력 충돌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은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베이핑에서 15km 떨어진 작은 마을인 완핑 인근에서 중국군을 겨냥해 총격을 가했다. 앞서 일본군 지휘관은 병사 1명이 실종돼 완핑에 진입해 수색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중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쑹저위안이 수색을 거부하자 '루거우차오'라는 다리를 사이에 놓고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틀간 벌어진 전투는 장제스에게 곧바로 보고됐다. 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일기에 "왜구가 루거우차오를 공격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군대를 투입해 일본의 야욕을 꺾어버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더욱이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이핑은, 역사적 상징성이 큰 만큼 가급적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노에는 "가장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밝혔으며,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일본군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중국군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목표로 하는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7월 26일,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가했다. 표적은 베이핑과 톈진이었다. 폭격기 등을 동원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에 이 도시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중국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당시 장제스는 당초 결의와 달리 정예병력을 신속히 북부 지역에 투입하지 않았다. 해당 군벌들에게 방어를 맡기다시피 했다. 다가오는 더 큰 전투에 대비해 병력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난징으로 돌아와 군사위원회 회의 및 비밀 합동국방회의 등을 열어 전쟁과 관련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도 참가해 항일통일전선이 실현됐음을 보여줬다. 장제스는 이 전쟁이 "중국 민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중국이 크게 부흥할 것이지만, 패배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싸울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것인가"라며 결단을 촉구했다. 일본군의 침략 행위와 장제스의 열정적인 연설로 인해 회의장 분위기는 전쟁 지지로 쏠렸다.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기립하라는 구체적인 의사표시 요구도 있었다. 원래 장제스의 노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일본과의 협상을 선호했던 왕징웨이 등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어섰다. 이로써 중국 정부의 방향성은 보다 명확해졌고, 본격적으로 중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357398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5188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