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 2] 20세기 최초의 세계 전쟁 전말
#. 아래 내용은 2025년 8월에 출간된 '전쟁의 역사' 주요 부분.
"특히 군사 행동의 첫 시기 동안, 우리 최고 지휘부의 주된 특성은 주도권의 결핍, 공격적 전투 수행 능력과 불굴의 투지 부족이라고 언급하면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언제나 대규모 단위 부대의 행동 불일치, 인접 부대의 상황에 대한 무관심, 패전을 서둘러 인정하는 것 등이었다. 전방을 향한 용감한 돌파 같은 것들은 그 누구에게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로파트킨 청원서 中
19세기는 열강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해 가던 시대였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국가는 단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대영제국)이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런데 영국처럼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싶어 하는 국가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부터 바다를 누비기 위해 해군력을 눈에 띄게 증강했다. 다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해상에서 영국의 절대적 존재감으로 인해 러시아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전 세계 거점 해로에 강력한 영국 해군이 포진해 러시아 해군의 진출을 봉쇄했다. 영국은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림반도 전쟁'에서는 러시아의 흑해 함대를 궤멸시키기도 했다. 러시아는 해상을 통한 세력 확대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고, 육로를 통한 세력 확대를 모색했다. 이에 자국의 영토와 닿아있는 중앙아시아에 눈독을 들였다. 이번에도 영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남하해 궁극적으로 인도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정치학에서는 이 시기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을 'The Great Game'이라고 일컫는다.) 러시아는 영국의 노골적인 견제가 지속되자 중앙아시아로의 진출 계획도 접었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대안으로 극동아시아 진출이 입안됐다. 이 지역에서 바다로 나가는 거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구체적으로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을 차지해 태평양으로 용이하게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어 쓸모없어진 항구만을 경험했던 러시아에게, 언제든 사용 가능한 부동항은 바다로 힘차게 뻗어나갈 꿈을 실현시킬 주요 수단이었다. 이에 적합한 곳은 중국 랴오둥(요동)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뤼순항이었다. 러시아는 극동아시아 진출 계획의 일환으로, 군대를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건설해 나갔다.
이 같은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은 1885년 조선의 영토인 거문도를 점령하며 견제에 나섰다. 다만 극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직접적 충돌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충돌의 당사자는 영국의 대리자라 할 수 있는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 등을 침략해 영토를 넓힐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1894년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의 목표를 달성할 커다란 촉매제가 될 것처럼 보였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급받았고, 요동반도도 할양받게 됐다. 할양받을 영토 중에는 러시아가 그토록 노렸던 뤼순도 포함됐다. 조선에서의 일본 영향력이 더욱 커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진출하려던 지역에 아시아의 작은 소국인 일본이 겁도 없이 들어오려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 간섭'을 행했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즉시 청나라에 반환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의 행태에 불만이 많았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하나만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독일, 프랑스까지 개입했기 때문이다. 반면 삼국 간섭을 계기로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을 조차 받아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했다. 독일은 칭다오 일대를 조차 받았다. 해당 사건은 극동아시아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 이런 가운데 1899년 청나라 북부 지역에서 러일 전쟁의 결정적 배경이 되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극단적인 외세 배격 운동이었다. 의화단은 청나라 정부와 손을 잡고 톈진과 베이징 등을 누비며 외국 공사관들을 습격했다. 외세에 도움이 되는 철도와 전신선 등 핵심 시설들도 파괴했다.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8개국은 연합군을 결성해 의화단 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해 약 2년에 걸쳐 일어났던 의화단 운동은 완전히 진압됐다. 문제가 해결되면, 각 국의 군대는 청나라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우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만주에 계속 주둔시켰다. 영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 러시아의 움직임에 분노를 표출했다. 영국은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일본과의 밀착에 나섰다. 비록 이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소국으로 인식됐을지언정, 영국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막는 방파제로 써먹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도 러시아를 혼자 상대하기 버거운 마당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이의 결과로 1902년 '제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됐다. 영국은 대한제국에서의 일본 우위를 승인했고 저리로 전쟁 자금까지 지원해 줬다.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사용한 전비는 총 20억 엔이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영국과 미국이 빌려준 것이었다.)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 동맹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비로소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