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의 몰락...'태평양 전쟁'

[전쟁의 역사 7] 광기 어린 폭주의 종지부 전말

by 최경식
image01.png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흘 뒤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있다. 세간에서는 이를 '분노한 신의 강림'이라고 표현했다.

#. 아래 내용은 2025년 8월에 출간된 '전쟁의 역사' 주요 부분.


"16시간 전, 미국 항공기가 일본군의 주요 기지인 히로시마에 폭탄 하나를 투하했습니다. 이 폭탄으로 우리 군대의 파괴력은 혁명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폭탄은 '원자폭탄'입니다. 우주의 기본적인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폭탄을 발견한 우리는 진주만에서 예고 없이 우리를 공격한 자들, 미국 전쟁 포로를 굶기고 구타하고 처형한 자들, 국제 전쟁법을 준수하는 모든 가식을 버린 자들에게 이것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수천수만 명의 젊은 미국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것을 사용했습니다.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 계속 사용할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만이 우리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해리 트루먼 美 대통령 연설 中


... 비로소 일본은 '대본영'이라는 조직을 구성해 침략 전쟁을 노골화하는 국가로 나아갔다. 국민들의 정신과 삶도 전방위적으로 개조하며 일종의 '전시통제국가'를 만들었다. 이는 1937년 중국 본토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중일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강력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은 전쟁 초반에 잇따라 승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행태는 미국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미 국무부는 일본에게 구두 경고를 가했다. 다만 물리적인 제지에 나서지는 않았다. 일본도 중일 전쟁 직후에 미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이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지 않자,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중일 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중국과 영국은 이 기회에 미국이 일본에 대한 즉각적인 압박 또는 무력을 행사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 수뇌부의 생각은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중국 점령을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을 즉각 제압하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념적으로 상극인 소련을 막는 방파제로써 일본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중일 전쟁으로 지쳐가는 틈을 활용해 극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용이하게 확대할 수도 있었다. 일본보다 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나치 독일을 우선적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에 따라 아직은 군사적으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며, 대일수출 등 경제적 교류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 일본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태평양에서 현상을 유지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대동아 신질서'를 표방하며 남방 공략을 본격화했다. 대동아 신질서는 일본, 중국, 만주, 동남아시아의 일부를 아우르는 '대동아'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이 승승장구하자, 독일과 밀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요나이 내각이 물러나고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들어선 뒤, 일본은 기본국책요강 등에 기반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최후통첩을 가했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는 민간교섭원 및 특파사절을 보냈다. 중국에 전쟁 물자를 조달하는 통로인 영국의 버마(미얀마) 루트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급기야 일본은 1940년 9월 23일 북부 베트남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호전적인 일본 군부와 달리 총리인 고노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단코 바라지 않았다. 제3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섰을 때, 그는 "미일 교섭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고노에의 최측근인 토요다 테이지로 외무대신도 대표적인 대미 온건론자였다. 이들은 미국과의 전쟁이 곧 일본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내다봤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군부의 압력을 물리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군부는 고노에 내각에 "베트남에서의 군사 행동을 예정대로 전개하고, 남방 및 북방에서 전비를 촉진시킬 것" 등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는 미국의 오랜 인내심을 거두게 하는 파국적 조치로 이어졌다. 7월 29일, 일본군이 남부 베트남에 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미국은 유화적인 태도를 버렸다. 즉각 베트남을 중립 지대로 만들라고 요구하는 한편 미국 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전쟁에 들어가는 석유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일본에게 해당 금수조치는 치명타였다. 당황한 일본은 대미협상안을 통해 "베트남 이외의 남서 태평양 지역에 진출하지 않을 것이니 금수조치를 풀어달라"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일본군이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멈추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라고 답했다.... 미국의 완고한 태도를 확인한 군부의 주도로 일본에서는 교섭 무용론과 전쟁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고노에와 토요다 등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전면전을 막아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특히 고노에는 중국에서 기회균등을 승인할 수 있고, 3국 동맹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의사가 있다고 미국에 밝혔다. 군대 주둔 문제도 군부를 뛰어넘어 일왕과 직접 협의해 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대신에 미국도 전향적인 자세로 나와달라고 촉구했다. (이것들은 사전에 군부와 전혀 협의되지 않은 고노에의 개인적 입장이었기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미국의 입장이 곧 전해졌다. 4원칙을 재차 강조하면서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나아가 말로만이 아닌 확실한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가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첨언도 잊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욱 강경해진 미국의 입장은, 일본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만주사변 이전으로 환원시키라는 것이었다. 고노에는 설득을 시도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때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본 군부도 "개전을 피할 수 없다"라고 장담했다. 육군 대신인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를 찾아가 교섭 타결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은 물론 육해군의 뜻도 모아졌다면서 총리의 결단을 촉구했다. 10월 12일, 고노에는 5대신 회의를 열고 현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매우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고노에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감행한다면 일본이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에 교섭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조 히데키는 교섭 노력은 중단돼야 하며, 점령지에서의 전면 철수라는 미국의 요구를 육군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동석하고 있던 해군 대신은 모든 결정을 총리에게 위임하겠다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대세는 육군을 대표하는 도조가 쥐고 있었다. 그는 급기야 고노에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사실상 육군이 내각 불신임 및 타도 의견을 표명한 만큼 고노에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10월 16일, 지쳐버린 고노에는 3차 내각이 출범한 지 3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다음 타자가 신속히 들어섰다. 10월 18일, 초강경파인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했다. 이를 지켜본 헐 국무장관은 "일본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다"라고 말했다. 11월 1일 일본 연락회의에서 전쟁 결의 및 12월 초 무력 행사 결정이 내려졌다. 단, 형식적인 마지막 교섭 단계도 있었다. 일본은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제국국책수행요강'을 기반으로 미국에 '마지막 정성을 다해 작성한' 안을 제시했다. 크게 '갑'안과 '을'안으로 나눠 제시됐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시시각각으로 파국이 다가왔다. 일본은 갑 안에 이어 을 안도 거부될 경우 개전하기로 했다. 조만간 을 안에 대한 미국의 답이 왔다. 이른바 '헐 노트'로 불리는 2통의 각서는 일본을 겨냥한 미국의 최후통첩이었다.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 군대 및 경찰병력의 완전 철수, 3국 동맹의 실질적 파기 내지는 사문화, 중국에 있는 일본 괴뢰정부(만주국, 난징 정권) 불인정, 다자간 불가침 협정 체결 등이었다. 이를 받아본 일본 정부는 즉각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뒤이어 12월 1일에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개전을 확정했다. 개전일은 8일이었으며, 공격 목표는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기지였다. 일본군은 이미 10월에 이곳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러일 전쟁 때처럼 사전 선전포고 없이 전력을 다한 기습이 행해질 터였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감안할 때, 전쟁이 장기화되면 불리해진다고 확신했다. 이에 전쟁 초반에 기습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유리한 위치에서 미국과의 협상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봤다. 해군 작전과 더불어 일본 육군도 말레이 반도 등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남방 지역을 공략해 나갈 계획이었다. 어느덧, 6척의 항공모함 등을 거느린 일본의 대함대가 은밀하고 신속하게 하와이 진주만으로 향할 채비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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