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 최악의 열전...'한국 전쟁'

[전쟁의 역사 9] 동족상잔의 비극 전말

by 최경식
image01.png 한국 전쟁의 중대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함정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 아래 내용은 2025년 8월에 출간된 '전쟁의 역사' 주요 부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군의 무력 공격을 중대한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 이 행동이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된다고 단정하며, 전쟁 행위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한다. 북한 당국은 즉시 그 군대를 북위 38도선까지 철수시킬 것을 요구한다. 본 결의의 이행에 있어, 모든 위원국이 유엔에 전적인 지원을 제공할 것과 북한 당국에 대한 지원 제공을 삼갈 것을 요구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中


... 북한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정규군을 창설했다. 1946년 7월,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 등을 모스크바로 초청한 뒤 소련군 지원 하에 군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후 무력 집단의 개편 등을 거쳐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정부 수립 직후에는 인민군 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소련군은 북한군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마자 철수를 단행했다. 철수할 때 적잖은 군수물자를 넘겨줌으로써 북한군 전력 증강에 보탬이 됐다. 기실 소련군 철수는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를 암묵적으로 압박한 셈이었다. 한국은 공산 세력의 준동을 우려해 미군 주둔을 계속 요청했지만, 소련군의 모습을 본 미군은 점차 철수 쪽으로 기울었다. 어느덧 북한에서의 권력 장악을 공고히 한 김일성은 1949년 3월부터 전쟁을 염두에 둔 행보를 보였다. 내부적으로는 군 병력충원제도를 지원제에서 징병제로 변경하며 전시 동원체제를 갖췄다. 외부적으로는 극비리에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을 만나 한반도 무력통일 계획을 제시했다.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우리가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할 필요가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남조선 반동 세력은 평화통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다. 우리 군대는 남한의 군대보다 훨씬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김일성의 계획에 스탈린은 의외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북쪽이 먼저 남침해서는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북한 인민군은 남조선 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둘째,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있다. 적대 관계가 형성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미소 협정이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 측이 먼저 협정을 파기한다면, 그것은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에 김일성은 크게 낙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를 통일할 기회가 없다는 뜻인가? 우리 인민들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어 하고, 반동 정권과 미국 상전들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하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스탈린은 "적이 침략 의도를 갖고 있다면 조만간 침략해 올 것이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반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때 반격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노련한 스탈린은 당초엔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반대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머지않아 스탈린의 마음을 180도 바꾸게 만드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우선 '주한미군이 철수'했다. 1949년 6월, 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철수를 완료했다. '소련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원폭 관련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기반해 8월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원폭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이제 소련은 비대칭 전력에 있어 미국과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이 공산화'됐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탁월한 전략 전술로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끝으로 '애치슨 선언'이 나왔다. 미국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다.


... 별안간 전쟁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2월,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과 여러 정세를 협의한 뒤 김일성에게 남침과 관련한 전향적인 전문을 발송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다시 모스크바를 극비리에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국제 환경과 국내 상황이 모두 '조선통일'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엘리트 공격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 창설을 서둘러야 한다. 사단의 무기 보유를 늘리고 이동 전투수단을 기계화해야 한다. 이와 관련된 귀하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다. 그런 연후에 상세한 공격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구체적인 작전도 지시했다. 38도선 가까이 있는 특정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킬 것, 북조선 당국이 평화통일에 관한 새로운 제의를 계속 내놓을 것, 상대가 평화제의를 거부하면 기습공격을 감행할 것 등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옹진반도 점령 계획에 동의했으며,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한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전쟁의 책임을 교묘히 떠넘기는 듯한 태도도 보였다. 마오쩌둥에게 가서 전쟁 '동의' 및 병력 지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첨언했다. 여전히 스탈린은 미국을 의식해 소련이 전면에 나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 마오쩌둥의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김일성은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달려가 전쟁 계획을 알리고 동의 및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마오쩌둥의 심정은 대단히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혈전이었던 '국공 내전'이 이제 막 종결됐는데, 또다시 전쟁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상대가 미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부담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고심 끝에 "미군이 참전하면 병력을 파견해 필요한 지원을 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국제 공산진영의 수장인 스탈린의 암묵적 압박이 있었고, 북한이 건재해야 중국도 무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앞섰다. 결국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추진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동의함에 따라 발발한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북한군은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으로부터 다량의 군수 물자들이 반입됐으며, 최정예라고 평가되는 한인계 중공군 약 5만 명이 북한군에 편입됐다. 몽골 인민공화국으로부터 군마 7000필을 지원받기도 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북한군의 전력은 눈에 띄게 강화됐다. 당시 북한군의 주요 전력을 살펴보면 전차 242대, 항공기 211대, 장갑차 54대, 박격포 2318문, 대전차포 550문, 자주포 및 곡사포 728문 등이었다. 북한군 10개 사단 약 13만 명이 전방에 배치됐고, 후방에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조직됐다. 반면 한국군의 전력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전차와 전투기는 아예 부재했으며 곡사포, 박격포, 장갑차 등은 북한군에 비해 극히 적었다. 병력은 예비군 없이 약 10만 명이었는데, 절반 가까이가 공산 게릴라군 소탕을 위해 38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배치됐다.


북한군은 남침 전까지 국지도발을 끊임없이 감행했다. 개성, 옹진, 춘천 등지에서 국지적 전투가 지속됐다. 특히 개성 일대에서는 2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통해 북한군은 사실상 '전쟁 훈련'을 한 셈이었다. 인민유격대를 후방에 침투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에 잠입해 각종 공작을 펼쳤다. 한국군은 북한 유격대를 소탕하느라 진땀을 뺐다. 북한이 도발만 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들어 위장 평화 공세도 펼쳤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제안하거나 체포된 북한 간첩과 조만식의 교환을 떠보기도 했다. 앞에서 교란 작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뒤에서는 북한군의 '선제타격 계획'이 도출됐다. 이는 소련의 바실리예프 군사고문단장과 북한군의 강건 총참모장이 공동으로 작성했으며, 총 3단계로 이뤄졌다. 1단계는 주공과 조공으로 구분, 주공은 서울 북쪽에서 직접 압박을 가하고 조공은 춘천-양구에서 원주-수원 방면으로 진격해 궁극적으로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2단계는 한국에서의 봉기 상황을 고려하며 4개 축선을 따라 군산-대전-대구-포항까지 조속히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3단계는 목포-여수-마산-부산을 연하는 선까지 진격, 미군 증원 이전에 한국 전 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스탈린의 최종 승인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1950년 6월 25일이 개전일로 확정됐다.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25일 새벽 4시에 전면 공세가 이뤄질 터였다. 뒤이어 사단급 부대 기동연습이란 미명 하에 '남침을 위한 부대이동 명령'이 하달됐다. 대규모 북한군이 38선 상에 속속 집결했다. 민족보위성은 적정 파악을 위한 '정찰명령 제1호'에 이어, 마침내 공격명령인 '전투명령 제1호'를 전 군에 발령했다.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에도 한국군의 대비 태세는 매우 허술했다. 6월 23일, 한국군은 45일 간 지속됐던 경계령을 해제했다. 장병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조치였다. 나아가 수많은 장병들이 휴가나 외출을 떠났다. 지휘관들은 전쟁 전날 한가하게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장교 클럽 개관식에 참석했다. 사실상 방조나 다름없는 행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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