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치욕스러운 전역...'베트남 전쟁'

[전쟁의 역사 10] 월남 패망사 전말

by 최경식
image01.png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소련제 탱크가 사이공에 있는 대통령궁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고 있다. 이는 사이공 함락과 월남 패망을 상징하는 주요 장면이다.

#. 아래 내용은 2025년 8월에 출간된 '전쟁의 역사' 주요 부분.


"수색을 하면서 걸어가면 사방은 고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공기는 말할 수 없이 맑았다. 나무와 푸른 숲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지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개인 소총, 기관총에서 로켓포에 이르기까지 광란의 '총포합동공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몇 초가 지나면 다시 평온이 찾아온다.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으면 '언제 총성이 들렸던가' 할 정도로 주변이 고요해지면서 수색 정찰은 계속됐다. 언제 다시 적의 공격이 이어질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미군 특수부대원 아이반 델릭 증언 中


"내가 베트남에 처음 갔을 때가 17세였다. 나는 베트남이 왜 중요한지 설명할 수 없었고,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20세가 되자 전투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미군 병사 데이브 크리스천 증언 中


... 미국은 남베트남을 철저히 보호하려 했다. 도미노 이론을 맹신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체를 장악한다면, 공산화 여파가 주변 국가에 강하게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북베트남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견지했다.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의 경우 북베트남에 석유, 시멘트, 중공업 등과 관련한 산업시설을 유지하고 있었다. 앞서 호찌민은 이러한 산업시설을 유지한다면 경제적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느덧 북베트남 친화적이 된 프랑스는 미국의 북베트남 적대 정책에 반대하기도 했다.) 응오딘지엠이 전면적인 사회 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제 하에 대규모 군사 경제 원조도 해줬다. 원조 첫 해에 2억 1400만 달러가 책정됐으며 군사고문단도 적잖게 파견됐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후원 속에서 여러 정책들을 시행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농업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통해 쌀 수확량을 급증시켰다. 외자 유치를 바탕으로 면직물 및 유리공업도 크게 육성했다. 양질의 수산물을 대량으로 수출해 커다란 이득도 남겼다. 아울러 '신은 남으로 갔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약 85만 명에 달하는 북베트남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 정착시켰다. 치안을 개선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곳곳에서 활개치고 있던 범죄 조직(빈쑤엔)을 소탕, 수도인 사이공을 '담이 낮아도 도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로 만들었다. 통치에 자신감을 갖게 된 응오딘지엠은 휴전 협정에 명시된 남북통합 총선거를 거부하고 남베트남 단독 선거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응오딘지엠이 어느 순간부터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956년 중순에 실시된 토지 재분배 계획이 고질적인 족벌체제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실패했다. 농민들은 프랑스 점령 시대보다 더 많은 세금까지 내게 돼 불만이 증폭됐다. 남베트남 국민들의 85%를 차지하는 이들의 지지세는 급격히 쪼그라들었으며, 농촌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와 민중 봉기가 잇따라 발생했다. 또한 응오딘지엠 일가족들의 부정부패가 심화돼 국민들의 신임을 갉아먹었다.


...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부정적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틈날 때마다 남베트남에서 암약하고 있던 게릴라들을 통해 테러를 일으켰다. 1960년에는 남베트남 공작을 본격화하기 위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 단체 산하에 있는 '베트콩'이라는 무장 조직이 맹활약을 펼치게 될 터였다. (베트콩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경멸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멸칭이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대남 공작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농민들에게 폭력 투쟁을 선동함은 물론 주요 시설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전략촌 계획'을 수립해 대처하려 했다. 농민들이 자력으로 베트콩을 막을 수 있는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하도록 한 것이다. 전국 농촌 지역에 5000개가 넘는 전략촌이 건설됐다. 미국은 이 전략촌을 '햄릿'이라고 부르며 많은 자금을 지원해 줬다. 이를 통해 성공적인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녹록지 않았다. 전략촌 건설에는 수많은 남베트남 농민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전략촌에 강제 편입되는 농민들도 많았다. 정부는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이나 재산권을 보장해주지 않고 부려먹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전략촌 자금을 사적으로 착복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렇다 보니 남베트남 농민들의 반감이 극에 달하면서 전략촌 계획은 역효과를 낳았다. 전략촌에 방어 무기도 충분히 공급되지 않았다. 당연히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베트콩에 포섭되는 전략촌이 증가했다. 그러면서 베트콩의 규모도 눈에 띄게 불어났다. 위기감을 느낀 남베트남 정부는 전략촌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 작전을 실시했다.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단 감금하거나 즉결 처형했다. 베트콩과 일반 농민들을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저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농민들이 늘어나면서 민심 이반은 더욱 극심해졌다. 응오딘지엠과 그의 정부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반면 호찌민과 북베트남은 쾌재를 불렀다. 이런 가운데 1961년 미국에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케네디는 전임자인 아이젠하워처럼 도미노 이론을 우려했다. 남베트남이 무너지면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가 차례로 공산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요시 남베트남에 미군 파견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와 미 군부는 흡족해했을지 모르나, 프랑스의 드골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는 파리에서 케네디를 만났을 때, "미국은 끝없는 전쟁과 정치적 수렁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아픈 경험이 드골의 마음을 여전히 짓누르고 있었다. 케네디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베트남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미 군사고문단을 크게 늘림에 따라 1962년 말에는 해당 인원이 약 1만 2000명에 달했다. 헬기, 장갑차 등 무기들도 공급했다. 핵심 참모 및 장군들을 잇따라 만나 전투 병력 파견과 관련한 논의도 이어갔다.


그 사이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정부는 국민들의 원성을 풀어주려 하기보단 탄압으로 일관했다. 특히 종교 박해에 항의하는 불교도들의 시위가 발생하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40명의 불교도들을 살해하고 수천 명을 투옥시켰다. 이에 반발해 틱쾅둑이라는 승려가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서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소신공양)했다. 그는 화염에 휩싸였음에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가부좌 자세를 유지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울부짖었지만, 틱쾅둑은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았다. 이 장면은 카메라 사진에 담겨 전 세계에 전파됐다. 이를 본 세계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응오딘지엠 정부에 대한 국제 여론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전국에 암약해 있는 베트콩의 공작도 극에 달했다. 남베트남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으로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처럼 응오딘지엠과 남베트남은 전방위적으로 곤경에 처했다. 미국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획기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남베트남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해법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 뒤 남베트남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을 논의했다. 쿠데타를 할 만한 장군들과도 은밀히 접촉해 거금을 쥐어주면서 쿠데타를 사주했다.


... 남베트남은 민, 킴, 돈이라는 3명의 장군들로 구성된 군사평의회가 주도했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독재자가 사라지고 새 시대가 열렸다며 환호했다. 이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군사쿠데타가 빈번하게 발생하며 국가는 대혼란에 빠졌다. 20개월 동안 10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국민들 사이에선 응오딘지엠 시절이 더 좋았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미국은 응오딘지엠 이후에 대한 면밀한 대책 없이, 성급하게 정권 전복을 단행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북베트남은 이 기회에 남베트남을 더욱 가열하게 몰아붙이기로 했다. 게릴라군이 아닌 정규군을 호찌민 루트를 통해 남파시켰다. 농촌 지역 등에서 베트콩의 준동도 강화했다. 남베트남 문제가 악화일로를 걷는 가운데 미국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케네디가 텍사스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에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어 린든 존슨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원래 부통령이었던 존슨은 남베트남 문제에 문외한이었다. 케네디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극빈자, 흑인, 교육 문제 해결 등 '위대한 사회 건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막상 대통령에 오르자마자 베트남 문제에 휘말렸다. 전임자들처럼 존슨도 도미노 이론에 공감했다. 이에 남베트남을 지원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었다. 가장 큰 고려 사항은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 여부였다. 기존의 지원 방식으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강경파 측근들도 미군의 개입을 주장했다. 케네디 시절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맥조지 번디 등이 그랬다. 남베트남의 실세로 떠오른 구엔 칸도 똑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베트콩군의 공격 범위는 사이공까지 미쳤고, 미군 시설 및 병사들도 위협을 받았다. 북베트남군이 전면적으로 침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일각에서 베트남을 라오스처럼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모든 군사적 조치를 통해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라는 의견이 대세를 형성했다. 존슨은 군사 개입을 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는 코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통령 선거도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에 맞서는 강력한 리더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대선에서 승리하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따라 미 군사고문단을 2만 3000명으로 증원했다. 뒤이어 맥나마라와 협의해 2단계 폭격 계획을 수립했다. 1단계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 내에 있는 북베트남 군사시설과 게릴라 근거지를 폭격하는 것이었다. 2단계는 북베트남을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것이었다. 합참본부가 지휘하는 폭격 작전에는 호놀룰루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도 참여할 예정이었다. 존슨은 이 계획을 북베트남에 전달해 압박을 가하고 협상장으로 끌어내려했다. 제한적 조처로 북베트남의 침략 및 공작 저지와 남베트남 영토 보존이라는 목표를 얻어내려 한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대남 공작과 전면 침공 준비를 이어갔다. 남베트남군도 간간이 북베트남 후방에 침투 공작을 펼쳤다. 북베트남 관할 하에 있는 혼메, 혼니우 섬을 무력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베트남에서의 전쟁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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