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들
2018년 6월 16일, 피피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집이 없었다. 일산 신혼집을 나온 뒤였고 구기동 빌라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우리는 임시로 얻은 공간에서 지내고 있었다. 피피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것은 꽤 되었지만 뚜렷하게 이상 증세를 감지한 것은 일산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유전병으로 인한 발작 증세가 나타난 것은 행신동에 살던 때였지만 그 무렵에는 급격히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날이 밝자마자 피피를 데리러 갔다. 피피는 입원실 유리창 너머에서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힘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피피에게 말했다. “집에 가자.” 이틀 전까지 피피가 살았던 집은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었지만 그 말이 피피를 안심시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임시 거처에 도착한 뒤 나와 남편, 동생과 제부는 작은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 넷은 피피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피피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았고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가족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개였다. 내 품에 안긴 피피의 작고 여린 몸이 가늘게 떨렸다. 잠시 후 발작이 일어났을 때처럼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잦아졌다. 피피의 심장이 멈추던 적요한 순간, 이 감각을 오래 기억하며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피피와 보낸 시간은 만 12년이고 함께 살았던 집은 네 곳이다. 봉천동, 금호동, 행신동, 일산. 신혼집을 떠날 때 구기동집이 피피와 지내는 마지막 집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사를 하고 한동안은 집 안을 두리번거리며 의아해했다. 피피가 어디 갔지? 그리고 다음 순간 망연한 심정으로 깨달았다. 피피는 이 집에 온 적이 없지. 내 곁에는 호동이가 있었다. 혼종견인 호동이는 사람들이 반려견으로 선호하는 개가 아니었다. 피피가 떠나고 얼마 뒤, 구조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입양 문의가 없던 호동이를 가족으로 맞이했다. 피피의 방석을 놓아주려던 자리에 호동이의 방석을 놓았다. 피피와 걸으려던 길을 호동이와 걸었다.
눈을 뜰 때마다 상실을 깨닫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밖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심지어 잠에서 깨자마자 난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다정한 존재와 함께한 내 삶의 한 시절이었다. 가끔 피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시절을 부르는 일이었다.
집과 동네가 위로가 되었다. 북한산 경관 보호구역인 구기동은 시야를 가리는 고층건물이 없어 곳곳에서 산이 보였다. 집들은 거의 다 오래된 빌라나 단독주택이었다. 주택가의 골목길은 산길로 이어졌다. 공황발작을 겪기 전에도 나는 좀처럼 바깥에 나가지 않았고 걷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과 가까운 동네에 사는 이상 조금은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이 동네로 이사 올 때 남편이 기대한 것도 내가 약간이나마 활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 옆에는 걷기와 달리기를 미친 듯이 좋아하고 하루 종일 간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생기 넘치는 동물이 있었다. 그 해 가을, 호동이와 함께 북한산 둘레길과 구기동, 평창동, 부암동 일대를 걷고 또 걸었다.
가끔은 부암동 주택가를 지나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걸어갔다. 부암동에도 7, 80년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30년 된 슈퍼마켓이나 40년 된 방앗간을 바라보았다.
탕춘대성이나 백석동천 같은 고색창연한 지명들을 입속말로 발음하거나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주택과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라진 것과 사라지고 있는 것에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낡고 애잔한 이 동네의 골목이 선망하고 동경하던 이국의 거리보다 좋았다.
나는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동네에서 내가 버리고 떠나온 과거와의 연속성을 느낀다. 예전에 살았던 집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장소를 목격했을 때 나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물리적 구조물을, 기둥과 지붕을 잃는 일이 아니었다. 그립지만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곳들, 낡아서 사라졌거나 낡기도 전에 사라진 곳들, 그곳에서 나의 과거도 휘발해버린 것 같았다.
오래된 장소는 사라진 것들을 대신한다. 이곳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 삶의 여러 기억이 이 집의 안팎에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