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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재영 Nov 25. 2020

서재의 주인

나의 자리, 엄마의 자리


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 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집들을 구경하다가 종종 이런 글을 봤다. “서재는 남편의 공간이고 주방은 저의 공간이에요. 그래서 서재는 남편 취향으로, 주방은 제 취향으로 꾸몄어요.”


어떤 여성이 주방을 ‘자기만의 공간’이라고 규정할 때 그녀가 집에서 점유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주방이 가족 공동의 공간이 아니라 여자만의 공간이라는 것은 가사 노동이 여자만의 일이라는 뜻일까? 책을 읽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 방은 남편의 공간으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은 아내의 공간으로 구분할 때, 부부 중 한 사람만 방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각각의 집들은 주인의 성향과 가족의 인원과 생활양식에 따라 다른 구성을 가진다. 누구나 우리처럼 세 개의 방이 있는 집에서 두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서재’는? 서재가 있을 때 그곳은 남편의 공간이거나 상황이 나으면 부부 공동의 공간이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의 집에서, 또는 온라인에서 본 집에서 서재를 아내만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맞벌이 부부라도 주방이 남편만의 공간인 경우는 없는 것처럼.




내가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좋아하고 독서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엄마였지만 왜 그런지 책상과 책장이 있는 서재는 아빠 방이었다. 실제로 그 방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아빠였고 엄마가 책을 읽는 곳은 주방 식탁이나 거실 소파 같은 공동 공간이었다.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이 언제든 방해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엄마의 독서, 사색, 휴식은 수시로 멈춰졌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시키거나 아빠가 출출하다고 말할 때, 또는 나와 동생이 사소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에.





내 방에서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피피와 살면서, 유기견들을 임시보호하면서 언젠가는 꼭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버려진 개에 관한 르포’였다. 우리 사회의 동물 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는지, 유기견 문제가 번식업이나 개식용과 어떻게 결탁하는지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버려진 존재의 이야기는 약자의 이야기였다. 약자의 이야기는 한 사회에서 자리를 가지지 못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신혼집에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한 책 작업은 그 집을 떠나기 몇 달 전에야 끝났다. 조사하고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집필했던 시간은 그곳에서의 거의 모든 기억이 되었다. 지금도 그 집을 회상하면 실내나 창밖 풍경, 심지어 신혼 시절의 행복했던 일들보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써내려가던 시간이 떠오른다. 그것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글을 쓸 때 나는 이 집에서 내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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