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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재영 Nov 25. 2020

집을 살피고 돌보는 시간의 즐거움

나를 책임진다는 것


쉬지 않고 일한 덕분에 금전적으로 약간 여유가 생겼지만 매일 집에서 일을 하느라 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 오로지 집에서 더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 구매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스피커를 장만했고 몇 년 전이었으면 쓸데없다고 여겼을 향초와 꽃을 정기적으로 샀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봤던 파스타 그릇과 좋은 소재의 흰 수건과 폭신한 감촉의 실내화와 향이 좋은 천연비누도 두었다.


생화가 꽂힌 화병에 물을 갈아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예쁜 그릇에 담아 먹을 때, 부드러운 수건으로 손을 닦을 때 나는 더 이상 여자의 날선 목소리와 히스테릭한 웃음소리를 듣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샤워를 하고 청소를 했다. 청소할 때는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지, 오늘의 집이 어제의 집과 같은지 점검했다. 집 안을 살피고 돌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청소가 끝나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작업실에 들어가 일을 했다. 한창 일에 몰두하다가 시계를 보면 여섯 시나 일곱 시쯤 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뒤에는 반려견 피피와 함께 동네를 산책했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일을 했다.


작업은 새벽 두어 시쯤 끝났다. 침실에 들어가 라디오를 켰을 때 FM에서 「올 댓 재즈」라는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재즈 음악만 틀어주는 이 방송의 여성 진행자는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사를 하고 몇 주가 지나자 새해가 되었다. 2012년이 시작되던 새벽, 침대에 누워 이 집에 오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했다. 나를 떠난 이들과 내가 떠난 이들을, 내가 아닌 타인이 나를 구제하리라 믿었던 나날을 생각했다. 남에게 의존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던 20대는 지나갔다. 나는 30대이고 혼자 나를 책임지고 있었다.


안온했다.


안온함은 책이나 사전에 존재할 뿐 일상에서 떠올려본 적 없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전화를 하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재즈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바라보다가 청취자 게시판에 들어가 지금의 기분에 대해 썼다. 신청곡은 어릴 때 아빠가 즐겨 듣던 사라 본의 〈April in Paris〉로 했다.


며칠 뒤 일을 마치고 라디오를 켰을 때 그녀는 나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해요. 나의 집에서 보내는 안온한 날들이 참 좋다고 하시네요.”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사라 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또 안온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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