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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재영 Nov 25. 2020

내가 서른이 된 순간

집다운 집



동생과 헤어졌을 때 그 아이는 서른 살,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동생은 “나도 이제 서른이니까”라고 말했지만 물리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면,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말처럼 서른이 “무엇인가 불안정하다”는 느낌과 “더 이상 젊지 않다”는 느낌이라면, 내가 서른이 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불안정함을 느낀 것은 동생이 따로 살자고 말했을 때부터였다. 동생과의 결별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의존하던 사람의 부재를 의미했다. 어떻게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어도 원하는 하나쯤은 성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혁명가, 모험가, 몽상가, 방랑자, 무정부주의자는 될 수 없어도 문학을 하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혁명가, 모험가, 몽상가, 방랑자, 무정부주의자를 모두 합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을 버리고 쓸모 있는 노동자로 살자고 다짐했을 때, 나는 비로소 서른 살이,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 나이가 되었다. 대가가 주어지는 일을 하고, 나의 일로써 나의 삶을 영위하며, 집다운 집에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독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집과 일이었다. 글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기에 대필이든 윤문이든 교정이든 글과 관련한 일이면 가리지 않고 맡았다. 에세이와 자기계발서부터 트렌드 서적과 경제서적까지 온갖 분야의 원고들을 쓰고 고치고 다듬었다. 대필 작가는 떳떳이 밝히기 어려운 직업이고 외주 교정자 역시 안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직업이지만, 나는 스스로의 노동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데 안도했다. 청탁이 없어 발표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있을 때 내가 소망한 것은 노동으로서의 글쓰기, 생계를 감당하는 글쓰기였다.




내 힘으로 보증금과 월세를 마련한 집은 서울에서의 열세 번째 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은 아니었다. 그곳은 더 북쪽, 경계 너머, 고양시였다.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은 서울과 가까우면서 서울보다 시세가 저렴했다. 다가구주택들도 연식이 오래되지 않아 깨끗한 집들이 많았다.

금호동 집이 1990년대 보급형 주택의 전형이라면(나무 창, 나무 방문, 갈색 몰딩, 옥색 싱크대, 청록색 타일) 적어도 이곳은 2000년대의 주택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손때가 묻고 흠집이 나긴 했지만 몰딩과 방문이 흰색이었고, 창에는 꽤 견고해 보이는 새시가 설치되어 있었다. 체리 색 싱크대와 구형 문고리와 낡은 형광등이 있긴 했지만, 게다가 큰방은 붉은 꽃무늬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나는 어느 셀프 인테리어 블로그에서 본 문장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60퍼센트의 집을 90퍼센트로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셀프 인테리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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