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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재영 Nov 25. 2020

내가 지낸 곳들은 집이 아니었다

자기만의 방


집을 떠나는 것, 가능한 멀리 떠나는 것. 그것이 스무 살의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한 번이라도 국경을 넘은 적이 있었다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레이캬비크나 남태평양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투발루 섬으로 가기를 꿈꾸었을까? 나는 그렇게 넓은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가고 싶은 곳은 서울이었다. 고작 거기가 내가 갔던 곳들 가운데 가장 멀고 넓은 세상이었다.


“서울 가면 그다음은? ”


엄마가 물었다. 나는 물음표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빠의 사업이 부도를 맞은 뒤 상황은 점점 나쁜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재기를 위해 아빠가 벌인 일들은 실패로 끝났고 IMF 사태까지 터지면서 아무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쁜 일이 지나가면 더 나쁜 일이 기다리던 그때 ‘다음’은 없었다. 다음이 없으므로 깨끗이 포기할 수도, 끝까지 오기를 부릴 수도 있었다.


“가고 싶은 데 가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대구에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집에서 빈둥거리자 엄마는 그런 말로 나의 서울행을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서 서울에 가려는 게 아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집 안을 떠도는 불운의 기운에서, 가족들의 한숨소리에서. 한편으로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늙어갈까 봐, 이곳이 내 세상의 전부일까 봐 두려웠다.




1999년 봄, 스물한 살의 나는 서울역 광장에 서 있었다. 어깨에는 백팩을 메고 손에는 슈트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설렘과, 어려운 집안 형편에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는 죄책감이 뒤섞였다. 역사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어딘가로 재빠르게 흩어졌다. 그곳에는 기어이 떠나는 사람과 마침내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마침내 떠나는 사람과 기어이 돌아온 사람인지도 몰랐다.


나는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축물 앞에 서서 1970년대에 지어진 대우빌딩을 올려다보았다. 막 상경한 지방 출신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그 23층짜리 건물은 고도성장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수도에 입성했음을 알리는 표지였다. 각자의 꿈을 품고 서울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대우빌딩을 올려다보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유미가 했던 질문은 10년 후 서울의 대학에서도 반복되었다. 이제 “어디 살아?”라는 말은 아파트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동네를 묻는 것이었다. 가끔 이상한 대답을 들었다. 집은 면목동이지만 중고등학교를 포이동에서 다녔으니 자신은 강남 사람이라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신림동에 산다고 말한 뒤 신림동도 한강 이남이니 강남과 다름없다고 덧붙이던 동기도 있었다. 종로구에 산다는 한 아이는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이라고 말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방에서 온 나는 한강이라는 근대적 기준과 사대문이라는 전근대적 기준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살았던 곳들은 모두 한강 북쪽, 주로 성북구, 강북구에 있었다. 월곡동, 미아동, 수유동, 안암동, 제기동, 약수동, 보문동, 동소문동, 돈암동.... 세상물정에 어눌한 20대 초반, 돈에 쪼들리는 지방 출신 유학생, 최저임금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집을 구하는 일이 언제나 어려웠다. 수없이 발품을 팔아 구한 집은 누수, 환기, 방범 중에 어느 하나는 문제가 있었다. 모든 게 다 괜찮다 싶으면 어김없이 주인이 임대비를 올렸다. 어떤 곳에서는 1년, 어떤 곳에서는 몇 개월. 나는 자주 짐을 꾸렸고 조금 익숙해진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다.


내가 지낸 곳들은 집이 아니었다. 나는 방에 살았다. 6년 사이 머문 방은 무려 아홉 개였다. 여러 명의 하우스메이트가 함께 지내는 집의 방 하나, 참견 많은 주인 아주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방문을 열어젖히는 하숙방, 싱크대 옆에 매트리스를 놓아야 하는 원룸.... 그 방들은 월세와 공과금을 나눠 내는 룸메이트가 함께 사는 공동 공간이기도 했다. 늘 옆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속상한 일이라도 생기면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쏟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혼자인 것과 항상 함께인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할까? 스무 살의 내 소원이 서울에 가는 일이었다면 스물여섯 살의 내가 바라는 것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은 독립과 해방의 공간이기 이전에 나의 눈물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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