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들이 결혼하자 아빠는 북성로 집을 팔았다. 이사 갈 곳은 대구의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고 있는 수성구 범어동이었다. 아빠에게 새집의 이름―명문 빌라―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빌라라는 외국어가 먼 나라의 지명처럼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기쁜 일은 나의 방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북성로 집 2층에는 우리 자매가 쓰는 큰방과 부모님이 쓰는 작은방이 있었다. 큰방에는 우리 물건인 책상과 피아노뿐 아니라 텔레비전과 화장대, 책장과 장롱이 있었다. 책장에는 어른들의 책과 아이들의 책이 뒤섞여 꽂혀 있었고 장롱에는 어른들의 옷과 아이들의 옷이 함께 수납되어 있었다. 삼촌들은 ‘우리 방’에 와서 책과 옷을 가져갔다. 엄마는 ‘우리 방’에 와서 화장을 했다. 아빠는 ‘우리 방’에 와서 야구 중계를 봤다. ‘우리 방’은 가족 공동의 방이었으므로 우리는 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89년 여름, 가족들은 새집을 구경하러 갔다. 나는 차창 밖으로 동네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골목이 많은 북성로와 달리 반듯한 직선의 찻길이 이어졌다. 아파트들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사거리에는 ‘스포츠 프라자’라는 건물이 있었고 상가에는 ‘○○제과’가 아닌 ‘파리바게트’라는 이상한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집을 보고 온 뒤 하루 종일 새집만 생각했다. 새하얀 벽이라니, 대리석 바닥이라니, 벽난로라니, 박공천장이라니, 테라스라니, 나의 방이라니. 한편,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북성로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물건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젊을 때부터 사용해왔던 낡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새집을 망칠 것 같았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북성로에서 쓰던 가구는 모두 버려졌다. 명문 빌라는 새집에 어울리는 새 물건으로 채워졌다.
“어디 살아? ”
경동 국민학교로 전학한 첫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신발을 갈아 신는데 같은 반 아이가 말을 걸었다. 귀밑까지 오는 짧은 단발머리에 볼이 통통한 여자아이였다.
“명문 빌라.”
무심코 집 이름을 말한 뒤 이 대화가 몹시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성로에 사는 아이가 “어디 살아?”라고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묻는다면 ‘어느 방향으로 가?’ 다시 말해 ‘집에 같이 갈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수성구에서 처음 만난 아이가 “어디 살아?”라고 묻자 자연스럽게 집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름이 있는 집, 아파트나 고급 빌라에 사는 사람들만이 묻고 답할 수 있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명문 빌라에 사는 애는 처음 보네. 너희 부자구나? 여기가 대구에서 제일 비싼 동네인 건 알지? 명문 빌라는 이 동네에서도 가장 비싼 집이야.”
우리 집에 대해 나도 모르는 사실을 그 아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어서 집의 평수, 아빠의 직업, 부모님의 차종 같은 것을 물었다. 평수나 차종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직업뿐이었다. 왜 이 동네로 이사 왔느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우물쭈물했다.
“그냥, 아빠 엄마가 오자고 했으니까.”
“너희 아빠 엄마가 왜 여기로 오자고 했는지 알아? ”
“몰라.”
“몰라? 당연히 학군 때문이지. 좋은 중학교에 가야 좋은 고등학교에 가고,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좋은 대학에 가잖아. 여기는 대구에서 가장 학군이 좋은 곳이야.”
수성구는 ‘대구의 강남’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수성구의 개발은 강남 형성기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오래전에 달성군이었지만 근대 이후 대구로 편입되었고 1981년에 대구직할시 수성구가, 1995년에 대구광역시 수성구가 되었다. 1980년대에 수성구가 부촌으로 각광받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고급 빌라가 지어지고 있는 수성구로 몰려들었다.
전학 후 첫 중간고사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어느 주말, 발코니에서 빨래를 널던 엄마가 나를 불렀다. “저기 봐.” 엄마의 손가락은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길도, 아파트 단지도, 놀이터도 텅 비어 있었다. 엄마가 보라고 한 것은 ‘텅 빈 동네’였다. “다들 집에서 공부하나 봐.” 그 풍경은 나에게 오랫동안 수성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았다.
명문 빌라에 살았던 기간은 5년이다. 아빠의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우리는 그 집을 떠났고,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러 번 이사를 했다. 명문 빌라 이후의 집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과 살았던 집을 생각하면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북성로 집과 명문 빌라뿐이다.
명문 빌라에 살던 첫해, 1989년 가을과 겨울은 내 유년의 암흑기였다. 여자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남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나는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도 아파트가 아닌 빌라에, 박공지붕의 벽돌집에 애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 외톨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나는 그 집을 좋아했다. 그곳은 그 전까지 살았던 집과 그 후로 살게 될 많은 집들 가운데 가장 좋은 집이었다.
‘대구의 강남’, ‘그 동네에서도 가장 비싼 집’에 사는 5년 동안, 나는 집이 가진 계급과 자본의 속성을 알아차렸다. 단지와 단지로 이루어진 아파트와 고급 빌라는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신분제 공간이었다. 신분제 안에는 이 아파트보다 저 아파트가 비싸고 이 단지보다 저 단지의 집이 넓다는 차이가 있었다. 어떤 어른들이 그렇듯 어떤 아이들은 그 차이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로 여겼다.
신분제 공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배제당하는 타자라면 우리 안에서도 더 위쪽에 있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구옥에 사는 아이들이 함께 놀지 않는지, 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중에서도 같은 아파트, 같은 단지에 사는 아이들이 더 친밀한지. 그것이 물리적인 거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눈치챘다면 열한 살의 나는 좀 더 세심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