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명문 빌라를 떠나 노후한 아파트에 전세를 살던 시절, 중학생이던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가난한가? 더 이상 아파트에 살 수 없어 낡은 상가주택과 다가구주택으로 이사를 다니던 시절, 고등학생이던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가난한가? 용달차에 플라스틱 서랍장과 접이식 탁자, 이불과 책을 싣고 한강 북쪽을 전전하던 시절, 대학생이던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오래 가난했던 것 같기도 했고 한 번도 가난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이 가난일까? 한강 다리 위에서 아파트촌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 도시에 집 한 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다 마음이 저려왔던 순간을 가난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어떤 방에 살아보고 나서야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의 어눌함을 자책하던 순간을 가난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전 세입자가 그랬듯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침묵한 채 폭탄 돌리기를 하는 심정으로 그 방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던 순간과, 죄책감에 휩싸여 도망치듯 떠나던 순간을 가난이라 말해도 괜찮을까?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클레인이 밀어버릴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신림동의 일곱 평짜리 원룸은 마포의 아파트와 난곡의 판자촌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 아무리 노력해도 한강 전망의 브랜드 아파트가 대변하는 삶에 진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력을 게을리하면 도시 빈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달동네 판자촌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난곡의 안쪽을 바라볼 때마다 ‘여기’가 최악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저기’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저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서나마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 절박함 앞에서 느끼는 안도와 불안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