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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만든 ‘욕망하는 집’, ‘열망하는 집’

-생각의 이동_1, '욕망'과 '열망' 사이-

‘욕망하는 집’에서 ‘열망하는 집’으로 집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생각의 변화가 보다 빨라졌다. 코로나 이전의 집은 ‘욕망의 대상’이었다. 사회적 계급이 거주하는 주택의 부동산 가격(계급)과 동일 시 되었기에 대부분 높은 가격대의 주택을 선호했다. 당연히 주택유형은 아파트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기준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이 최근 늘고 있다.  

  

‘욕망’의 사전적 의미는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다. ‘열망’의 사전적 의미는 ‘열렬하게 바람’이다. 탐하는 것과 바라는 것의 차이만큼이나 열망보다 욕망의 힘이 더 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욕망의 대상이 아파트였다. 그러나 코로나가 많은 것을 바꿔놓고 있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집에 있는 것은 좋은데 집 밖에 나가기 불편하고 재택근무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이 놀자고 성화다. 단지로 나가봐야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을 뿐 나무가 빼곡한 공원이나 강변 산책로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속에 담아두던 집들이 TV에서 하나 둘 나타났다. 최근 방송되는 몇몇 TV 프로그램은 욕망하던 집에 살던 사람들이 ‘열망하던 집’으로 하나 둘 불러 모으고 있다. MBC ‘구해줘 홈즈’가 대표적이다. 바라는 집을 자산 규모에 맞춰 비교해 찾아준다. 중요한 것은 라이프스타일을 담을 수 있는 집을 찾아준다는 것이 묘미다. EBS의 ‘건축탐구 집’은 살고 싶은 집에 대한 통찰을 담는다. 연령, 주택규모, 주택유형은 다르지만 가족을 닮은 혹은 집을 닮은 집과 사람들의 속살을 살핀다. 파일럿 프로그램이었지만 SBS의 ‘나의 판타집’은 개인적으로도 울림이 크다. 각자 원하는 집의 이미지를 제시하면 그런 집을 찾아 며칠 동안 살아본다. 살고 싶었던 집에서의 생활과 반응을 카메라에 담는다. 원했던 집이라는 공간을 ‘가격’이라는 값어치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면서 느끼는 ‘삶의 가치’로 접근하는 시선이 좋다. 그래서인지 방송 속 연예인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공감대가 형성된다.


살고 싶은 집에 대한 공감은 여운이 오래간다. tvN ‘바퀴달린 집’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외부 공간으로의 여행조차 어렵고 불편한 상황 속에서 지역의 명소를 찾아 눈 호강과 힐링을 함께 제공한다. 이동할 수 있는 캠핑카지만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포근함이 있다. 외딴곳에서 ‘한 달 살기’로서의 tvN의 ‘여름방학’, 삼시세끼 역시 다른 곳의 다른 집에 대한 열망을 예능과 섞어 만든 프로그램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주하는 주택을 쉽게 선택할 수 없지만 방송을 보면서라도 달래고 싶은 소시민들의 열망을 해소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양가성, 양가감정(兩價感情 , ambivalence)을 대리만족시켜준다.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가 대표적인데 자연 속이 아니라 도시 속에서 그런 집들을 보여준다. 시청자들에게 이런 감정을 의도했다면 나름 성공한 방송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가격’이 중요한 ‘욕망의 집’ 아파트에 살지만 어린아이들이 뛰 놀 수 있는 작은 마당이 있는 집, 스킵플로어 등으로 내부 평면 구조가 다양한 집. 한쪽에 유리로 만든 그린 죤(green zone) 온실이 있어 나무나 식물 가꾸기를 할 수 있는 공간, 호젓하게 명상하거나 잠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곳’으로 숨어들 수 있는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는 집 등 열망하는 콘텐츠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그럼에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 여유로운 공간, 공간과 공간 사이를 나누는 벽이 아니라 나와 가족의 생활과 삶이 스밀 수 있는 집들이다.


공간을 채우는 것이 식물일 수도 재택근무 시 업무 해결을 위한 곳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만의 취미 활동을 위한 공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아파트 일변도가 아니라는데 있다. 욕망하는 집이 아니라 열망할 수 있는 집을 찾다 보니 아파트는 제외되기 십상이다. 대부분 단독주택이거나 규모가 작은 공동주택이다. 도심에 있기도 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한 각각의 집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바로 각자가 원했던 방식의 주거와 집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유발한다.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열망하는 집이 있다는 것은 잠을 자기 위한 집만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과 같다. 집은 자기 삶의 ‘철학’을 담는 그릇이다. 어떤 집에 살 것인가? 지금, 집이 나에게 묻고 있다.    


(copyright. 서정렬)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욕망과 열망 사이'의 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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