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인 서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by seoul

택배가 도착했다.

팀원 지인 농장에서 온 들기름.

짙은 적막 속

바쁘게 움직이 듯

요란한 키보드 소리가 울린다.

단체 채팅방은 북적이는 듯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동시에 움직였다.

나는 단체 톡방에서 빠져 있었다.

문득, 잔혹한 진실 하나가 떠올랐다.

여자들의 세계에서, 공구는 유대이자 소외다.

한 공간 안에 있지만,

전혀 다르게 존재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있지만, 없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공간

'단체 톡방'이다.

입사 후 근무하는 동안

단체 톡방의 존재는 낯설진 않지만,

내가 끼어들 만큼 가까운 거린 아닌 듯해서

초대되지 않아도 괜찮았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아, 내가 모르는 일들로 이들은 서로라고 생각하고 있었겠구나...'

그 서로엔 나는 포함되지 않은 사람

그래서 무시해도 되는 투명한 존재가 되었던 듯했다.


“택배 도착했어요~"

"들기름 냄새 너무 고소해요!”

'웅성웅성'

소란스러웠다.

택배를 맞이하는 모습이 분주했다.

팀원 지인 농장에서 공구한 들기름.

모두가 주문을 넣었고,

서둘러 택배 박스를 를 나눈다.

다 같이 움직이는데

나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 택배를 기다린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이야기 속에… 나는 없다.

혹시나 물어봐 주어도 좋았을 뻔한, 그 공구.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나는 늘 다른 사람 같았다.

'에일리언'

그 순간에는, 서운함이 들었다.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난 이방인, 합법적 이방인.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 노래가 생각이 났다.

나는 이곳에서 지금껏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내가 하는 행동은 이상했고,

사회성 결여된 파트타임하는 애 키우는 여자.

동정표를 사기에 딱 좋은 위치로 가엽시 여겼졌다.

아무도 묻지는 않았다.

그 외에 질문들은 없었고,

그저 지례짐작의 태도들만 보였다.

조심하는 건지... 배려하는 건지?

인간적 존중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배려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선의 인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베풂이었는지...

그 파트타이머의 위치가 인간의 위치가 되어버리는 세계관이 매우 불편했다.

서로의 이익으로 함께하는 자리에도 고정직으로 취급받지 못하며,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지만, 반가워요."라는 인사를 받는 너무도 가벼운 직책이었다.


I don't take coffe, I take tea, my dear

전 커피를 안 마셔요 차를 마신답니다.

I like my toast done on one side

토스트는 한쪽면만 구워 먹어요.

And you can hear it in my accent when I talk

내가 말할 때 당신은 내 발음에서 알 수 있죠.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전 뉴욕에 있는 영국인입니다.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 노래가사처럼

나의 기질과 취향을 얘기라도 하면

나는 여전히 그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특이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내가 하는 말은 그들의 침묵과 짐작에 묻혀버리고

나는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하지 않은 사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낯선 사람이 되었다.


If "manners maketh man" as someone said

누군가 말했듯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면

He's the hero of the day

그가 바로 오늘의 영웅일 거예요.

It takes a man to suffer ignorance and smile.

진정한 남자만이 무시를 당하고도 웃을 수 있지요.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누가 뭐라든 항상 자신을 잃지 마세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정말 점잖게 들리지만 그게 통하는 사람과 장소는 없다.

그 똘똘 뭉친 무례한 공기는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아주 충분했다.

아무리 매너를 다잡아도,

그들 앞에선 침묵조차 예의 없는 것으로 낙인찍혔다.

점잖음은 방어가 되지 못했고, 공손함은 약점이 되었으며,
결국엔 예의는 나만 지키는 싸움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웃지 못했다.


들기름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소란도 잠잠해졌다.

나는 숨죽여 이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았다.


"친구가 건강문제로 귀농을 해서, 그곳에서 들기름을 직접짜요."

아... 친구분과 이야기하다 들기름을 구매하셨겠지만,

내가 없는 단체 톡방에서 구매 희망자를 모았을 것을 생각하니

코웃음이 쳐졌다.

"그 친구가 어릴 때부터 노안이었어요~" 그 말에

"어~우, 노안 노안은 좀 안 됐네요.."라는 반응이 나왔다.

할 말도 없나 보다, 싶었다.

충분히 배제된 사람 앞에서 분위기 무마하려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이건 공식적으로 배제된 인물이라는 확인 같았다.


아, 또 빠졌구나. 익숙한 외면. 은근한 열외.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분위기.

하지만 나, 사실 들기름 필요 없다.


“들기름 필요했는데 덕분에 유기농으로 구매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죠."

인사가 오갔다.

'그 덕분에' 란 말 나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 대화 바깥에 있다.


똑같이 웃고, 똑같이 인사하고, 똑같이 성실하게 일하는데

공구 하나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나만 “우리”가 아니게 된 기분.


나는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참여하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말도 없었고, 의논도 없었고, 그냥 어느 날 결정되고, 그냥 어느 날 배송됐다.

이럴 거면 각자 집으로 받지 무겁게 회사로 보냈을까?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들기름이 아니다.

그들의 연대의 상징이고, 관계의 암호다.

들기름 하나쯤 안 받아도 되는데,

나 한 사람은 빠졌어’라는

무언의 확인이 오늘 하루를 좀 쓰게 만들었다.


들기름,

필요한지 한번 물어봐줬으면

정말 좋았을 뻔한 일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아쉬운 대로 괜찮은 사람인지라...

'아, 나는 들기름이 필요했던가'를 생각하게 됐다.

우리 집엔 벌써 2병이나 있다. 엄마가 직접 짜서 보내주신 진짜 들기름.


그런데 왜 이렇게 서운할까?


그래서 나는 다시, 작은 다짐 하나를 꺼냈다.

됐다. 됐어~

들기름 공구가 뭐야 대체!

'나는 들기름 공구에 참여하면서, 따분하게 살지 말자!'라고

다짐했다.


누군가가 고른 선택지에 순하게 이름만 얹는 삶, 그건 나답지 않아.

짜인 틀에 껴 맞춰 맞지 않은 박자를 얼추 맞추고

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먹지도 않는 내 들기름을 생각하며,

내 방식으로 살아야겠다 또 다짐했다.


오늘도 들기름 공구에 빠져도 쿨한 파트타이머 취급을 받으며,

외톨이가 되었다.


들기름 공구에서 빠진 게 오늘은 조금 서운했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그 들기름. 그냥 그랬어.

그러니 다음번엔,
그저 말 한마디쯤은 먼저 건넸으면 좋겠다.
내가 들기름을 원하는지, 아닌지.
그 질문 하나가
사람을 안 보이게 만들지 않는 방법이니까.


어떤 유대도, 사소한 ‘물어봄’에서 시작된다.
나는 묻지 않은 세계에 속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도 내 방식으로, 조금은 서운하고
조금은 괜찮게 살아간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존재하는 사람’이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yiety'

겸손과 예의가 되려 악명이 될 수도 있고,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결국 그 때문에 외톨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요.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이 사회에서 점잖음과 절제는 거의 볼 수 없어요.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밤에는 태양보다 촛불이 더 밝죠.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중에서



이방인이 되더라도,

나를 지키고 싶다.

다른 사람인척

연기하고 싶지 않다.



b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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