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 울지 마, 이건 그냥 요리야. 말락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자타르와 올리브 유가 담긴 아라베스크 문양의 도자기 그릇.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온통 황토 빛 이국적인 바깥 풍경과 대비되게, 어리바리 한 한국 여성이 서있다. 팔레스타인 주방에. 정체 모를 고기 덩어리와 날카로운 부엌칼, 적 양파와 감자, 당근, 불고기 소스에 둘러 쌓인 채로.
손에 잡히는 모든 재료를 똑같은 크기로 썰었다. 그다음에 순서도 없이 전부 때려 넣었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 모든 재료를 프라이팬에 한꺼번에 들이붓기 전에, 말락에게 묻고 싶었지만 별 수 없었다. 말락의 방문을 열면 겨우 잠든 이안이가 깰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 핏줄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본능 같은(있지도 않은) 것을 의지하며 내 맘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안 됐었는데 말이다.
얼마 후 말락이 방에서 나왔고, 확신 없이 움직이는 내 손과 프라이팬,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말했다. “are you sure?” 그 말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내 자기 확신을 모두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락을 쳐다봤다. “I don’t know, what should I do?” 그러자 말락이 탄식하며 내가 들었던 주걱을 대신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볶고 있던 야채 더미를 휘적거리더니 말했다. “아, 당근이랑 감자 너무 커! 이거 이안이 못 먹어. 안 익어. 더 작게 썰어야 해.” 어쩔 수 없이 볶던 야채들을 다시 모두 도마 위에 꺼낸 다음 하나하나 더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창피했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첫째로는 기껏 사간 비싼 불고기 소스를 제대로 되지 않은 요리(?) 양념으로 사용해서 낭비하는 것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한국인도 아닌 아랍인에게 불고기 요리에 대한 쿠사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말락도 요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꾸 내가 뭔가 하려고 하면 이건 안된다 저건 안된다, 내가 만든 야채 더미를 향해 한숨을 푹푹 쉬는데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점점 요리는 산으로 가고, 나는 죽상이 되어가고.. 어느 이상한 시점에 내 눈물이 빵 하고 터져버렸다. 그리곤 토하듯 말했다. “나 안 해. 이럴 거면 너가 해!” 그리곤 울었다. (나도 안다, 최악이었다.
그러자 말락은 금방 말을 고쳐먹고, 나를 달래줬다. “혜진 울지 마, 이건 그냥 요리야.” 항상 말락은 나와 같은 위치에 있다가, 이럴 때 언니가 된다.(원래 언니이긴 하다). 지금 생각하면 말락이 백 번 맞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맞지만. 그때는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긴장되는 환경 속에서 예민해져서 그런지, 너무 화가 나서 생각나는 대로 말락에게 고여있던 마음을 모두 쏟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해? 나한테 지금껏 이래라저래라 했잖아!" 그러자 말락은 계속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옹졸한 내 마음을 폭 감싸고 무안하지 않게 약간은 놀리는 듯한 웃음으로 말했다. “너도 알잖아. 아랍 사람들 원래 말투가 세게 해. 나 엄마한테 말하는 거 봤지? 이거 원래 내 말투야. 나 화낸 거 아니야” 웃기지만 그 말을 들으니 오해가 풀리고 기분이 괜찮아졌다. 이상한 타이밍에 짜증 낸 게 부끄러워졌다.
정체 모를 재료를 다 털어서 조사버린 다음 볶아낸 팬을 들고 식탁으로 가자, 말락의 엄마는 웃으며 거실 부엌으로 오셨다. 이 한국에서 온 여자애가 뭘 만들었나 잔뜩 기대에 찬 미소였다. 엄마의 기대 가득한 표정을 보자 갑자기 프라이팬을 들고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생김새를 보시고는,, 약간 당황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린 모두 사회인인 관계로 체면을 지켜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이안이에게 말을 걸었다. “Look 아유니! (여기선 이안이를 이렇게 부르더라,, 약간 애칭인 듯했다) what’s that?”
왓츠댓? 만든 사람도 답을 해줄 수 없었다,, 모두 한입 씩 먹을 정도로 접시에 덜어 배급했다. 한입 먹더니 엄마는,, 오 이거 정말 달다^^라는 미소와 함께 사라지셨고,, 말락은 한입을 먹자마자 부엌에 가서 소금을 가져와 왕창 뿌렸다. 난 한 번도 불고기가 달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 생각해 보니 어제 먹었던 엄마 요리에 비해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접시를 싹싹 비웠다.
그날 이후로 감람산에 머물렀던 5일간 단 한 번도 불고기 소스는 냉장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말락의 엄마는 나에게 요리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매일 저녁마다 엄청난 요리들을 해주셨다. (땡큐 맘,,)
요즘도 말락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때 불고기 덮밥 이야기를 한다. 얼마 전에 말락이 내가 돌아가고 나서 혼자서 불고기 소스로 또 요리를 했다고 말해줬다.(감사하게도 버리지 않았구나 싶었다.) 근데 우리가 그때 같이 만들었을 때 맛이 안 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잖아” 말락이 말했다. “맞아 그건 드라마가 잔뜩 담긴 음식이었어.”
엉터리 요리도 나름의 추억과 의미를 섞으면 잊을 수 없는 맛을 가진 요리로 기억에 남는다.
그날 우리가 만든 불고기 덮밥은 무려 전쟁 중에 만든 불고기 덮밥이고, 소스는 헝가리에서 가져왔으며,, 한국인이지만 한국 요리를 못하는 한국인과 한국말은 하지만 한국 요리는 라면 끓이는 것 빼고는 할 줄 모르는 아랍인이 같이 만든 ‘불고기 어쩌구 덮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