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제 시인의 말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 이문제 시인의 말
이문제 시인의 말만으로도 울림이 있어, 차마 내 문장을 덧붙이기가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문장을 마주해야 한다.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강레오 셰프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한국에서 서양 음식을 공부하면, 런던에서 한식을 배우는 거랑 똑같은 거죠. 그러니까 본인들이 커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자꾸 옆으로 튀는 거예요. 분자요리에 도전하기도 하고…’
옆으로 튀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사람이라면 굳이 개인 프로젝트를 할 이유는 없다. 자꾸 다른 것에도 도전하는 것도 커리어를 극복하기 위함도 맞다.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는 한 강레오 같이 되기란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런데 그런 점이 오히려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원동력이다. 근본이 없으니 생뚱맞은 무언가를 해도 무관하다. 새로운 시도를 할수록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더 명확해진다. 롯데리아처럼 과감한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정체성이 될 수 있고, 서울처럼 (서양 기준에서) 근본은 없지만 세련되고 트렌디한 것 자체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진 못했다. 그런 나에게 지난 다빈치모텔에서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님이 했던 말이 위안이 됐다. “슈퍼콘서트는 이제 슈퍼콘서트의 문화적 공헌은 이제 없다고 봐요. 또 뭘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다. 주기적으로 다시 물어보면 된다.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